독후감

마케팅에 물든 교회---1 (옥성호 저)

천국생활 2008. 3. 14. 15:51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옥성호

 

상기 책을 읽고 난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신학을 한 사람으로서 현대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옥성호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마케팅 전문가로서 교회를 보는 놀라운 통찰력과 깊이 있는 연구에  감사와 칭찬을 하고 싶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비성경적 교회 성장에 목을 걸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복음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심정에 동의한다. 대형교회는 많은 소형교회의 희생가운데 성장했다. 그 성장의 속은 수평이동으로서 하나님편에서 볼때 성장이 아니었다. 교회성장학이 교회예배학을 앞선지가 오래다.

신학과 영성이 같이 가야하나 신학은 잠오게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교리는 성장저해 요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교회 헌법은 그 힘을 잃은지 오래다. 교회가 교회 헌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사회가 법을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목사는 복음을 선포하면 된다. 심는 일과 물주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목회 성공을 해보겠다는 욕심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다. 시골교회 목사와 도시 교회 목사의 상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준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에게 성장의 무거운 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숫적인 성장을 위해 마케팅에 물들수 밖에 없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약]

 

종교개혁자 루터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그때는 말씀의 권위보다 전통의 권위에 의지하고 있었다.

오늘날은 말씀의 권위보다 마케팅의 능력, 심리학의 치유만족, 엔터테인먼트의 달콤함에 의지하고 있다.

그래서 부흥을 이야기 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 위한 개혁이 필요한 시대이다.

 

교회 마케팅의 대부인 조지 바나는 교회가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정체되고 있다고 하였다. 신학보다 기교가 복음의 중심을 차지하게 한 대부이다. 그는 '교회 마케팅이란 교회가 목표로하는 사람들의 영적, 사회적, 정서적,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킴으로써 교회의 사역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고객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교회가 수행하는 사역활동이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의 욕구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피부로 느낄수 있는 당장의 필요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케팅에서 말하는 고객이 욕구 또는 필요를 확실히 채우는가에 성공여부가 달렸고 고객의 필요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때 실패한다는 것과 똑같다. 그는 예수님을 마케팅의 전문가라고 평하고 교회를 회사로 생각하고 있다.

 

저자는 여기서 마케팅 교회의 공헌도 얘기하고 있다. 교회가 시선을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돌려야 함을 일깨운 것이 공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하는 마케팅 교회의 방향은 올바르지만 그 내용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교회의 본질을 놓고 교회가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이미 세상이 교회 속에 먼저 들어온 후에 나아갔다고 지적하고 있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 때문에 복음을 마케팅하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은 복음의 가치를 그 만큼 하찮게 보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복음은 왕이 주신 하사품과 같은 것이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교회는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한번 키워 보겠다는 의지로 충만해있으며 교회가 성장의 달콤함을 맛보기 시작하면 그 성장을 더 가속화시키기 위한 마케팅의 유혹에 빠지기 더 쉽다는 것이다.

 

마케팅 교회는 3가지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1. 세상사람들은 진리를 알기 위해 목말라 있는데 교회는 전통적 모습만 고집함으로 그들의 목마름을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 

2. 비록 형식은 다양함을 취해도 그 속의 본질은 변함없다.

3.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채워 주다 보면 언젠가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이 세가지는 마케팅 교회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낙관적 사고와 인본주의에 물들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였다.(갈1.10)

 

마케팅 교회의 시대적 배경을 사상의 흐름으로 쉽게 정리하여 누구나 이해할수 있게 하였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핵심인데 이는 과거 프랑스 혁명 전까지의 '프리모더니즘 시대에 초자연적인 존재, 즉  하나님을 믿던 시대와는 반대편에 서있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를 본격적인 모더니즘시대라고 할수있다. 모든 초월적 존재에 대한 포기,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 진화론이 탄생한 시대,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왜곡 변질을 가져온 시대이다. 모더니즘은 계몽주의라는 말로 표현할수도 있다. 칸트는 신을 알수없는 존재로 규정함으로 불가지론에의 문을 열었고 초월적 실재가 사라진 자리에 과학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이성이 앉게 된 것이 모더니즘시대이다. 그 시대에 이신론이 탄생했는데 하나님은 창조후 멀리서 방관자로 계시고 인간에게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모더니즘 시대가 교회에 끼친 영향은 교리실종의 초래이다.

 

그후에 인간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함으로 과학이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파괴시키는 것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모더니즘시대는 과학이 신이었으나 결국 실망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등장한 사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후기 모더니즘'---과학을 최고의가치로 생각하던 시대에 큰 절망을 경험하자 이제는 신도 과학도 이성도 믿을수없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지금은 진리 실종의 시대이다. 객관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시대이다. 모든 과거의 옳고 좋은 가치도 해체시키는 시대이다. 그래서 이제는 개인의 자아가 진리이다. 개인마다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진리이다. 나에게 진리는 느낌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질문이 아니라 무엇이 내게 더 좋은 느낌을 주는가로 대체된 시대이다.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바뀐 시대이다. 이 사회는 각자가 내린 정의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충동질하는 사회이다.

모든 책임의식은 사라졌다. 이런 시대는 하나님도 나의 느낌을 만족시키는데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하다.

책임이 사라진 자리에 옳은 것을 하라는 말을 할수가 없게 되었고 원하는 것을 하라고 말해야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는 나의 자아를 관용하지 않는 사람을 참을수가 없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 밀수가 없다. 상대적 가치일뿐 상대를 틀렸다고 말할수 없는 시대이다.

교회는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므로, 서로 사랑할수없는 관계가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물든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것은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이다.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기준은 효과 또는 효율이다. 그래서 교회는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기관으로 전략할수있다.  구원은 인간의 선택에 달렸다고 말하게 되고 그래서 구원은 선물도 아니고 은혜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에 빠진 교회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고민한다. 그래서 간증을 좋아한다.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본문과는 다른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어떤 효과를 얻는가 이것이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해도 교인수는 줄었다는 통계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