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천국생활 2022. 9. 26. 12:42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김기석(20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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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빌 1:12-18
(2022/09/25, 창조절 제4주)

[형제자매 여러분, 내게 일어난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도움을 준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내가 갇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 확신을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고 다투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전합니다. 좋은 뜻으로 전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지만, 시기하고 다투면서 하는 사람들은 경쟁심으로 곧 불순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

• 부끄러움은 우리 몫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좋은 가을날이지만 우리 마음은 조금 우중충합니다. 상서(祥瑞)롭지 못한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성급하고 정제되지 않은 말이 늘 문제입니다. 말은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도 하지만 갈라놓기도 합니다. 말하기 전에 세 황금문을 지나게 하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참된 말인가?’, ‘이것은 필요한 말인가?’, ‘이것은 친절한 말인가?’ 교만과 자애심에서 발화되는 말은 반드시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말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듭니다.

야고보는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운다며(약 3:5b) 몸의 아주 작은 지체인 혀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우리의 언어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롱과 냉소의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혐오과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Lingua Fundamentum Sancti Silentii). 어느 예배당 제단에 적혀 있는 글입니다. 말을 많이 하고 사는 저도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가을이면 각 교단의 총회가 열립니다. 팬데믹 상황을 통과하면서 이 어둠의 시대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천박한 실용주의가 정의와 공의의 원리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교회 세습을 금지하는 교단법을 무력화시키는 조치를 추인한 교단도 있고,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다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한 교단도 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교회는 여전히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교인수의 감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교단의 신자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입니다. 스스로 설 자리를 좁히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각 교단 총회가 기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탄소중립과 기후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선언적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여 연구하고, 그것을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는 기후 정의 행동을 요구하는 시민 3만 5천 명이 광화문에 모여 새로운 질서를 열어갈 다짐을 했습니다. 지금은 긴급한 시기입니다.

• 매이지 않는 복음
꽤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오늘의 상황에 대해 낙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절망감을 이해하면서도 저는 어쩌면 힘이 되지 않을 격려를 하곤 합니다. 우리는 낙심하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라고 부름 받았다고 말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시의 화자는 눈 덮인 숲가에 가만히 서 있습니다. 그가 타고 있는 작은 말은 주인이 “일 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농가 하나 없는 곳에/이렇게 멈춰 서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시의 마지막 연은 시의 화자가 그곳에 있는 이유를 아름답게 드러냅니다.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그러나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그리스도를 길로 고백하는 우리도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습니다. 눈이 덮였다고 하여 멈출 수 없는 길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그 길을 걷는 이의 아름다움을 처연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갇힌 자가 되었습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신세였습니다.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어둡고 음울한 정서가 드러날 법도 하지만 그의 서신에는 기쁨과 감사의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로하는데 그 어조가 사뭇 경쾌합니다. 그는 자기가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전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육신을 갖고 산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입니다. 물 가운데를 지나야 할 때도 있고 불 가운데를 지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걸을 때도 있지만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를 걷는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그 일에 반응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희생자 의식에 사로잡힌 채 누군가를 원망하고 투덜거리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느 분은 이런 삶을 일러 진상 고객처럼 사는 삶이라 하더군요. 반면 그런 삶의 도전에 창의적으로 응답하면서 그것을 정신적 자산으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전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그의 매임이 로마의 엘리트 군인들에게 복음의 신비를 드러낼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면에서 빛이 나는 사람은 감옥에 갇혀도 빛을 발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둘째, 많은 형제자매들이 바울을 보고 더 큰 확신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빌 1:14b). 죄수와 연루된다는 것은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고 수치를 한사코 피하려 하는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추문거리가 될 수도 있고, 위험을 자초하는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리낌 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고난은 신자들을 주눅 들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고양의 순간이고 자기 초월의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낡은 세상 질서 속에서 나른한 영적 잠에 빠진 이들을 보며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눅 12:49) 하고 탄식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불이 붙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 의도가 무엇이든
그러나 모두가 한 마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 가운데는 바울이 겪는 고난을 보고 분발하여 용감하게 진리를 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바울에 대한 시기심에 사로잡혀 열심을 내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화로운 인격의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그들은 자기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불순한 동기, 즉 바울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믿음의 보람은 자기를 넘어서는 데 있습니다. 더 큰 세계에 접속하는 순간 자아는 작아집니다. 하지만 믿는다고 자부하지만 매사에 자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늘 자기를 향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칭찬을 갈망합니다.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사로잡힌 이들은 공동체에 분란을 일으킵니다. 자기 의는 영적 성장의 걸림돌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이들은 늘 다른 이들과 자기를 비교합니다.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빈곤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부정적인 면을 증폭시켜 폭로합니다. 그런 이들을 만나고 나면 왠지 구정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이 불쾌해집니다.

그런 이들이 있음을 알지만 바울은 크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그런 처신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현실의 다른 면을 보고 있습니다. 선한 뜻에서 하든 시기심에서 하든 전해지는 것이 그리스도면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철저히 여읜 사람이기에 가능한 태도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통해 자기의 실상을 속속들이 보았습니다. 스스로를 구원하거나 새롭게 할 힘이 자기에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는 철저히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싹텄던 것입니다. 그가 불쾌할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도 의연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 곤경 속에서 누리는 기쁨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빌 1:18a) 씁쓸함조차 없었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눅진해진 이불을 볕에 널어 말리듯 바울은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씁쓸함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나님의 은총 앞에 내놓는 일에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의 전환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 묵상, 봉사, 절제, 인내의 훈련 말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자기 마음을 살피는 동시에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보이는 시간입니다. 정직하게 내보일 때 하나님의 정화와 치유가 시작됩니다.

바울은 인간의 실수를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했습니다. 깊은 신뢰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바로 기쁨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빌 1:18b). 행복감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찾아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족들 혹은 벗들과 느긋한 시간을 즐길 때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아도르노라는 사회학자는 “행복이란 에워싸이는 것, 즉 어머니 품 안에 보호된 상태의 모사물”(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p.159)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행복은 돌아볼 때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쁨은 다릅니다. 기쁨은 곤경 속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기쁨은 자기 존재가 확장되는 경험과 관련됩니다. 누가는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가 매를 맞고 풀려난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행 5:41)고 전합니다. 히브리어로 기쁨을 뜻하는 단어 ‘simha’는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에서 누리는 영혼의 약동을 뜻합니다. 이건 근본적인 기분이기에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기에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조바심치거나 낙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이들은 조바심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일을 우리가 완수할 수 없다 하여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출애굽 공동체를 이끌었던 모세는 하나님께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그는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올라 후손들이 살게 될 가나안 땅을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모세 나이 백스무 살이었습니다. 성서 기자는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신 34: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빛이 살아 있었다는 말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가 하나님의 빛으로 현실을 보았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고,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고, 광야를 못으로 바꾸고,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사 41:18). 우리는 바로 이 꿈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두운 현실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즐겁고 기쁘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처절한 방랑에서 자기를 구하시고, 당신의 길 위에 세워주시고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닫거라. 내가 너희를 안아다주마. 내가 너희를 데려다주마. 거기 가 내가 안아주마.”(성 아구스띤, <고백록>, 제6권 16장, 최민순 번역, 성바오로출판사, p.162)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돛을 펼치는 선원들처럼 우리도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하나님의 꿈은 지속됩니다. 이 한 주간 동안 의와 평화와 기쁨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할 용기를 내시길 빕니다. 아멘.

새컬럼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

김기석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



상황이 암담할 때면 사람들은 문제의 크기에 압도되게 마련이다. 살다보면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에 직면할 때가 있다. 거대한 바위가 길을 막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 바위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레 판단한다. 그러나 그 큰 바위를 움직일 수는 없지만 그 바위를 잘게 쪼개며 제거할 수는 있다. 일단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터키의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소설 쓰기를 가리켜 ‘바늘로 우물 파기’라 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열정과 인내가 있기에 그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부작침磨斧作針,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말이다. 세상에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처럼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일 속에 뛰어든 사람들이다.



폴란드 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는 ‘신세계’라는 시에서 현실을 면밀히 살핀 후에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정상적인 것들은 가장 짧게 지속되고/비정상적인 것들을 이해하기는 너무 쉽고/순응하기는 더욱더 쉽다/그 쉬움이 너를 안심시키지 말기를”. 사람들은 쉽게 현실에 순응한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알고 산다. 순응 혹은 적응은 지혜가 아니라 비겁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야 한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염려와 근심 그리고 체념이 아니던가?



몇 달 전 북촌갤러리에서 열린 “시리아愛봄” 사진전이 떠오른다. 내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시리아의 상황을 알리기 위한 전시였다. 많지는 않았지만 그 사진들은 인간의 잔혹함과 파괴성과 더불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의 숭고한 모습을 담고 있다. 포연이 피어오르고 있는 마을, 건물의 잔해에서 구출된 아이를 품에 안고 달리는 사람들, 아비규환의 상황에 내몰려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려는 사람의 물결 등이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조용히 희망을 만드는 이들이 있다. 흰색 헬멧을 쓰고 시리아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현장에 출동해서 긴급 구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일에 뛰어들었다. 흰색 헬멧은 그 땅에서 시작되는 희망의 상징이다. 터키와의 국경 지대 인근에 세워진 난민 캠프도 볼 수 있었다. 직접 사진을 찍기도 하고 또 다른 이의 사진을 선정하기도 한 압둘와합은 참혹한 느낌을 자아내는 사진은 일부러 배제했다고 말했다.



난민들은 헬프시리아가 준비한 구호물품을 가지고 그곳을 찾은 압둘와합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도 필요하지만 자기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라며 학교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 파종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청이었지만 꼭 해야만 할 일이었다. 그래서 학교 세우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1년 안에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난민촌에 살고 있는 인부들은 학교를 3개월 만에 지었다. 자기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기에 그들은 24시간 3교대로 일했던 것이다. 난감한 상황에 몰려 있으면서도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들은 비록 난민촌에 살고 있지만, 서로 돌보며 살았던 기억 그리고 그곳에서 배웠던 소중한 가르침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꾸게 될 것이다.



폐허 더미를 치우며 희망의 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보람은 영적 존재인 인간의 일용할 양식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할 정도로 분열되어 있다. 신뢰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서로 다른 진영에 선 사람들은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적대적인 말, 냉소하는 말, 비아냥거리는 말들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말과 감정의 찌꺼기들이 켜켜이 쌓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그 자리야말로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야 하는 자리이다. 흰색 헬멧이 시리아 난민들의 희망이듯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새로운 세상의 단초가 되어야 한다. 참 빛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현실을 뚫고 솟아오르는 법이다.



(* 2022/08/31 자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