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천국생활 2022. 9. 3. 13:33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김재흥(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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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10:7-8
(2022/08/28, 왕국절)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질병과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스러져간 수원 세 모녀의 영혼 위에도 주님의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가난하고 병들어 힘들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분들이 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셔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슬픈 죽음이 이 사회에서 반복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사회가 놓친 사람들입니다. 다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조금만 더 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향해 마음 쓰며 살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통치가 절실한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 통치의 원리인 생명과 평화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생명세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앙으로, 기후재앙을 넘어 기후붕괴시대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올여름 전 세계는 역대급 폭염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유럽의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포르투칼은 기온이 무려 46.3도까지 올라갔습니다. 7월에서 9월 평균기온이 30도였던 스페인도 45도까지 올라갔습니다. 이상고온현상에 수천 명이 죽기도 했습니다. 유럽 전역이 폭염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포르투칼, 스페인, 프랑스는 대형 산불까지 겹쳐 어려움이 더욱 컸습니다. 폭염은 가뭄으로 이어졌습니다. 큰 강들의 수위가 대폭 낮아져 화물선이 다닐 수 없게 되고 수력발전을 할 수 없게 되어 물류와 전기발전에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강수량이 급격히 떨어지고 가뭄이 심해지니 농산물의 피해도 컸습니다. 각종 농작물의 수확량이 적어져 이 어려운 시기에 물가까지 올랐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항들은 기후붕괴의 작은 단면일 뿐입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후붕괴 현상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인류가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이 붕괴 현상은 가속화되리라는 것입니다.

세계자연기금 WWF는 2020년에 지난 50년간 전 세계에서 동물이 3분의 2나 사라졌다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세계자연기금은 1970년부터 지역별⋅시기별로 동식물 개체군의 변화를 조사했습니다. 전 세계 동식물 10만여 종을 대상으로 조사해 그중 32,000여 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지금 추세라면 수십 년 내 동식물 50만 종과 곤충 50만 종 등 약 100만 종이 멸종 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잘 살던 100만 종이 멸종 위기종이 된 이유는 호모 사피엔스 한 종 때문입니다. 3년 전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했을 때,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개발로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이 인간의 거주지까지 내려왔고 동물들 속에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지며 코로나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코로나가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간이 이 지구 생태계를 교란하고 위협하는 바이러스이고 코로나는 그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자연이 만든 백신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며 그런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인간은 코로나에 맞서 백신을 만들었지만, 코로나는 그런 인간의 노력을 비웃듯이 새로운 변이를 끝없이 만들어냈습니다. 그런 코로나를 보면서 사람들은 ‘참으로 코로나 너무하다’라는 생각을 했지만, 거듭거듭 변이를 만들어냄에도 어떻게 해서든 대응하는 인간을 보며 코로나도 똑같은 생각을 할 것만 같았습니다. ‘인간들 참 너무하네. 이렇게 해도 잘못된 삶의 방식을 바꾸질 않으니 어쩌란 말인가.’ 여전히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는 코로나 속에 담긴 자연의 절규를 전혀 듣지 않고 있습니다. 잘못을 아프게 반성하지 않으니 바뀐 것이 전혀 없습니다. 코로나 이전과 비교했을 때 바뀐 우리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까? 실내에서 마스크 쓰는 것 하나 빼고.

그리고 기후위기와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인류애를 발휘해 함께 협력하고 도와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신냉전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구냉전 시대는 미국과 소련이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미국과 중국이 중심이 되어 세계적인 긴장과 갈등을 만들고 있습니다. 친중국 정책을 펴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구소련 국가들이 친미로 돌아서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이 전쟁은 신냉전의 불을 당긴 전쟁입니다. 전쟁이 발발한 지 반년이 지나고 있지만 언제 휴전 및 종전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제재로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중단했는데 그로 인해 에너지 대란을 겪고 있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 무역을 하던 여러 나라가 무역이 중단되고 인플레이션까지 겪으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안타깝고 속이 상합니다. 우리 인류가 고작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단 말입니까? 그 수많은 어리석은 전쟁을 겪으며 온 게 여기란 말입니까? 그간 역사를 통해 무얼 배웠단 말입니까? 이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대립하며 전쟁을 꼭 해야 했습니까? 꼭 경제 패권국가, 군사 패권국가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힘의 국가와 돈의 국가가 아니라 평화의 국가와 생명의 국가가 되면 안 되겠습니까?

이상기후가 이상기후가 아니라 일상기후가 되고, 광범위한 동식물의 서식지 파괴로 수많은 생물종이 멸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잘못으로 삶의 터전인 지구가 망가지고 수많은 생명들이 사라지고 있는데도 우리 인간은 아무런 반성과 변화도 없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싸울 뿐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중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먼 나라에서 살고 있는 존재, 하나님의 통치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있는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자부하며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여기고 있는 우리 인간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 당시의 시대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에서 먼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민중은 말 그대로 도탄塗炭에 빠져 있었습니다. 도는 진흙 구덩이를 말하고 탄은 숯불을 말합니다. 진흙 구덩이에 빠진 듯 아무리 애를 써도 어려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고, 이글거리는 숯불에 대인 듯한 고통을 매일 겪으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와 로마에 걸쳐 수백 년 동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자유와 해방에 대한 소망의 불은 거의 꺼지고 절망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억압과 수탈이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위로와 희망이 되어야 할 성전은 한 편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성전체제를 유지했고, 민중의 삶이야 어떻게 되든 성전체제를 통해 본인들의 배를 불리고, 자신들만을 위한 전통과 율법수호에 집중했습니다.

사회체제와 종교로부터 아무런 돌봄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용만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준 것은 광야에서 날것의 말씀을 외치던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때 세례 요한이 말한 가까이 다가와 있는 하나님 나라는 ‘심판의 나라’ 혹은 ‘심판’ 그 자체를 의미했습니다. 곧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절한 이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을 내리실 날이 다가오니 회개하고 그 심판을 피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요한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보아도 심판의 때가 가까이 왔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았고, 사람마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고쳐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오늘 우리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심판의 때가 왔음을 인식했고, 그 심판의 날을 벗어나고자 자기의 잘못된 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옥에 갇히자 바통을 이어받듯이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습니다. 그 말씀을 선포하신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벌일 제자들을 모으셨습니다. 그리곤 제자들과 더불어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가르쳐 주셨고, 백성들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위로해 주시는지, 치료해 주시는지를 잘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위로받고 치료받아야 할 백성이 많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곳곳으로 파송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 한 말씀이 오늘의 본문이 마태복음 10:7,8입니다. 그때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 곧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표현하고 마태복음에서는 ‘하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를 꺼리던 유태인 마태는 ‘하나님’대신 ‘하늘’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디를 가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고, ‘앓는 사람을 고쳐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사용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과 예수님이 사용하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 속에 담긴 뜻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와야 한다’는 기대에 방점을 찍어 사용했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성취에 방점을 찍어 사용하셨습니다. 많은 이가 하나님 나라는 이 현실의 세계가 아닌 저기 어디 바깥에 있다가 갑자기 임하는 나라, 마치 힘이 센 나라가 그보다 약한 나라를 힘으로 제압하고 공격해 하루아침에 권력을 쟁취하는 나라라고 인식했습니다. 로마 제국에 반대해 무장투쟁을 벌였던 열혈당원들도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도 그런 나라를 바랐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왕좌에 오르실 것으로 알고 자기들을 그 좌우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이미 우리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는 나와 너 사이에서 이루어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행동에 따라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와 ‘앓는 사람을 고쳐주고, 죽은 사람을 살려주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고,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행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따로 있고 치유와 돌봄과 나눔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와 돌봄과 나눔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제 일성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지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제 일성은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 거기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앞으로 이루겠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이루어졌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다’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왔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선포한 대로 사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억눌린 사람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그 나라를 경험할 수 없던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로 살다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 나라에서 먼 시대 먼 나라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로 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먼 나라를 이룬 사람들, 하나님의 통치에서 멀어진 사회를 이룸으로 더욱 안정적이고 더욱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던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아주 위협적이고 위험한 반체제였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 희생과 헌신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인은 아니었지만 로마가 만든 체제, 로마가 만든 폭력적인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불의하고 부정한 성전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신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그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섰을 때, 자신들에게는 ‘로마 황제밖에는 왕이 없다’(요19:15)고 고백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무엇을 최고의 권위로 삼고 살고 있는지를 실토한 것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몸으로 살아냈던 나라는 로마였습니다.

시인이요 사상가인 박노해의 <다시>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로 자신을 채운 사람은 그 자신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먼 나라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보며 사는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 나라가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 사람이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등장하길 바라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 구원받기를 바라며 신음하는 피조물들이 있습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 전쟁으로 가족과 고향을 잃고 낯선 땅에서 삶 같지 않은 삶을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절망하며 스러져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 나라에서 먼 시대이지만, 우리가 그들 곁에 다가가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 줄 때 그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집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하나님 나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면서 몸으로는 다른 나라를 사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하나님 나라가 되어 주셨던 것처럼 속절없이 스러져가는 여린 생명들과 절망에 빠진 이들 곁에 다가가 하나님 나라가 되어 주십시오.

절기는 처서를 지나 백로로 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다행스럽게 절기가 작동합니다. 그러나 언제 이 절기가 작동을 멈출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절기가 계속 절기로 작동할 수 있도록 자연을 잘 돌봐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절기 또한 저절로 오는 절기가 아닙니다. 왕국절기가 되었다고 결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절기를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왕국절기가 오는 것입니다. 죽임의 문화가 가득하고 분열과 갈등이 깊은 이 절망의 세상에서 생명과 평화와 희망의 하나님 나라가 되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