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이 확실히 알고 말하자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바로 이런 공산주의 역사이론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 그 전제 위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유관순 열사가 그 책에서 빠진 것이 문제가 아니다. 교과서 전체의 틀, 구조(structure)가 문제다. 그 구조가 전달하고 있는 특정한 정치적 이념이 바로 공산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사상이란 점이 문제다.
이 교과서는 사회주의 사상 그 자체를 민중사학(民衆私學)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를 그 책에 추가할 것을 요구하여, 비록 그것이 포함된다 해도 여전히 교과서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폐기되어야 할 책이지 수정 혹은 개정되어야 할 책이 아니다. 개정은 해결책이 아니고, 폐기하고 새로 쓰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유일한 해결책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국정화에 찬성한다. 현재의 검인정 체제를 일단 그대로 유지하고 검인정 체제 안에서 이 교과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매우 낙관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이 국정화를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그 짧은 성명서에서 모두 다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정도라면 현재의 검인정 제도 안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명서에서 “한국 학계의 문제해결 능력 및 자정능력을 불신”하지 말고 이 문제를 “역사가의 전문성과 자율성에 맡기”고 조용히 각자의 삶을 살 것을 설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매우 합리적이며, 상식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왜냐하면 지금 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은 역사전쟁이고 이 전쟁에서 이 교과를 만들고 앞으로 계속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지(高地)를 선점(先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과 전쟁을 하지 않고도 현재의 검인정 제도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들은 애써 점령한 고지를 쉽게 내어주는 바보들이 아니며, 그들은 노련한 싸움꾼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본교 역사신학교수들 중에는 그들에게 싸움을 걸 사람도 없고, 그들과 맞붙어 싸워 이길 수 있는 분도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고쳐달라고 호소하는 것 정도다. 그러나 역사신학교수들이 아무리 눈물로 개정을 호소하고, 그래서 그들이 우리 교수님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이곳, 저곳을 부분적으로 고쳐준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개정을 거친 그 책은 여전히 유물론적 역사관, 계급투쟁론, 제국주의와의 투쟁과 해방을 강력하게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근현대사 역사해석의 문제는 전쟁이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학계 내부의 학자들 간의 논쟁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이념문제 때문에 전쟁을 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정치제도로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였고, 경제제도로 자유시장경제를 선택하였다. 북한은 정치제도로 인민민주주의, 즉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경제제도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책임지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제도를 선택했다. 사실 조선왕조가 망한 뒤 우리의 선조들은 미래에 세워질 독립국가에서 어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부터 논쟁하였다. 이 두 상반된 입장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1945년 해방을 맞이하기 오래전부터, 좌-우 양편, 즉 사회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으로 나누어져 싸워왔다. 그 논쟁은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라 양쪽이 서로 죽이고 죽는 무력충돌로 이어져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21년 6월에 중국에서 일어난 “자유시 참변”이다. 무장 투쟁을 하던 독립군들이 함께 모여 통합하려던 와중에 좌-우파 독립군들끼리 서로 총을 들고 싸운 사건이다. 그 이념적 전쟁이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어 터진 것이 바로 6.25 전쟁이다. 이 전쟁은 단순히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을 대신해서 우리민족이 싸운 것이 아니다. 6.25는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간의 전쟁이다. 그리고 지금 그 전쟁은 대한민국 안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지만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지금 좌우 이념 대립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 중 상당수가 관련된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에서 만들어 유포한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는 물론 그 내용이 상당히 문제가 많지만, 그 제목은 매우 정직하고 정확하다. 그렇다. 이것은 전쟁이다! 백년간에 걸친,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未完)의 전쟁이다. 그들은 한국 근현대사를 전쟁터로 인식하고, 지금까지 충실하게 전쟁을 수행해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이것을 전쟁으로 인식하기는커녕, “한국 학계의 문제해결 능력 및 자정능력을 불신”하지 말고 학자들에게 맡겨놓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국 학계”가 이미 이런 민중사학을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이 다수가 되어 이미 역사학계는 이들에게 평정되었다. 왜냐하면 한국 근현대사 해석의 문제를 놓고 지금 일개 신학교 바울신학 전공교수인 내가 이 문제를 지적해야 할 정도로 현 역사학계에서 아무도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민중사학에 반대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역사학자로서 책임을 방기(放棄)한 것이고, 그것은 비겁한 것이다. 나는 그들의 침묵을 민중사학에 대한 동의(同意)로 간주한다.
그리고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이 이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단 한 페이지짜리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이 지금까지 침묵한 것은 그들이 민중사학의 입장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본다. 만약 아니라면 소리를 크게 내어 외쳐야 할 것이다. 장신대 교수들이 좋아하는 ‘이 시대의 선지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교과서가 있어서 서로 견제하고 균형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나도 기본적으로 찬성한다. 역사신학교수들은 “최선의 해결책은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를 통한 건전한 견제와 균형이다”고 성명서에서 주장했다. 검인정 교과서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보다 더 균형 잡힌 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하기 위해 지난해에 교학사에서 한국사 교과서를 만들어 출판했을 때 전국의 초중고 학교 중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일부 학교들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전교조와 언론 각종 시민단체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나는 똑똑히 보았다. 전교조에서는 심지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들을 위험 학교로 분류하여 홍보하겠다고 위협했다. 소위 다양한 교과서로서 기존의 교과서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단 한 가지의 새로운 교과서가 등장했을 때 검인정 교과서를 만들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역사관을 달리 하는 교과서를 용납하지 못하고, 단 한군데의 학교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나는 당시 좌파 지식인 중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나서서,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면 안 된다. 건전한 견제와 균형을 위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를 내버려 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 ‘단 한명의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이유는 오늘 날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다 죽었기 때문이다. 좌파 지식인들은 이념에 다 함몰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라, 이념가다. 나는 지금도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를 통한 건전한 견제와 균형”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본교 역사신학교수들이 왜 그 때에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제야 소리를 높여 ‘국정화 반대’를 외치는 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대들은 좌파지식인이라고 그 때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것인가? 왜 그 때에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역사신학교수로서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행동과 “건전한 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들이 공격을 당할 때 왜 그 때는 침묵하다가 이제 와서 뒷북을 치는가? 결국 전국 2318개 학교 중 단 한 곳의 학교도 교학사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게 되는 결과가 왔을 때에 나는 좌파 역사학도들의 폐쇄적이고 교조적인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것은 내가 1986년에 주체사상을 주장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장악해 나가던 주사파(주체사상파)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지 않다. 자랑스럽다. 나는 북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시민이 아니라, 자유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하나님의 나라도 아니고, 자유시장경제 제도가 완벽한 경제 제도도 아니지만 북한의 전체주의보다 훨씬 낫고, 사회주의 경제제도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제도에 만족한다. 나도 현재의 제도에 약간의 문제가 있고,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이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다른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현재의 체제를 부정하고 다른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한다면 나는 그들과 싸워 막을 것이다. 6.25 때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친 나의 선배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듯이 나도 지킬 것이다.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는 현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인민민주주의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다. 그 책들을 읽고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회주의 이론을 잘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나는 그런 책으로 대한민국의 미래의 주역들이 한국사를 배우는 것에 반대한다. “신앙인으로서,” “학자로서,” “국민으로서,” 반대한다. 건전한 자유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우리 자녀들이 자라기 위해 지금은 ‘긴급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의 긴급한 제안이 없었더라면 나같이 비겁한 사람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끝으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에 관해 몇 자 더 적고자 한다. 성경과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진리는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다 다 갖고 있는 죄와 구원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그 사람이 정치적으로 좌파이건 우파이건, 경제적으로 상류층이건 하류층이건(자본가이건 프롤레타리아건, 부농이건 빈농이건), 남자건 여자건, 백인종이건 흑인종이건 황인종이건,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의 문제를 갖고 있고, 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 구원은 영원한 생명, 즉 종말에 영원한 몸을 입은 하나님의 성도로 부활하여 종말에 이루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8장 32절이 말하는 “진리”이고 우리가 그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진리 안에서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같은 신학교 교수로서 나는 그런 점에서 우리 교수들이 세속사회의 논쟁적인 주제에 관해서 섣불리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나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사실 내가 정말로 원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회자 후보생을 교육하는 신학교 교수고, 신학교 교수들은 성경과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신학교 교수가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일반대학교의 교수들이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동이다. 신학교 교수의 성명서는 기독교 복음과 성경의 진리를 근거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교수 집단의 주장을 넘어서 복음과 성경의 주장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지게 된다. 때문에 신학교 교수들이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성명서를 남발하는 것보다 성명서는 아끼는 것이 더 현명하다. 최근에 장신대 교수회가 성명서를 낼 때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반대했다. 성명서 내용도 반대했지만,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특히 성명서 내용 중 사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것들에 나는 강하게 반대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장신대 교수들은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남의 눈의 티를 빼겠다고 하기 전에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장신대 신약학과 교수 김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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