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강론

성경해석 역사

천국생활 2017. 7. 31. 12:52

성경의 해석 / 문자적 해석

 

 

 

이 글은 성경 해석에 있어 ‘문자 해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설명해 준다.

성경 해석학에 있어 ‘문자적 해석’이란 글 그 자체에 얽매인 해석이 아니다. 문자적 해석이란, 문법적, 문헌학적 해석을 말한다. 문자적 해석은 통상적 의미의 구조 아래에서의 해석을 말한다. 관습적, 사화학적 통용의 의미로도 해석된다. 고지식한 축자주의가 아니다. 축자주의 영감설이란, 해석학은 하등 상관 없는 해석의 범위를 말할 뿐이다.

문자적 해석은 알레고리 해석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문자적 해석 없이, 알레고리적 신비적 해석으로 바로 넘어가버리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단, 교권주의 등이 여기에서 발현한다.

 

 


문자적


 

우리는 이 “문자적”이라는 단어를 그 사전적 의미로 사용한다. “...글이나 표현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구성과 의미, 단어의 일상적이고 명확한 의미를 따르는 알레고리나 신비적이지 않은”(웹스터 성경사전). 우리는 또한 이 단어를 그 역사적 의미로 사용한다. 특별히, 중세 시대에 발전되었고 역사적으로 어거스틴의 3중 이론에서부터 나온 로마 가톨릭 학자들의 4중적 이론(역사적 의미, 도덕적 의미, 알레고리적 의미, 종말론적 의미)에 반대하여 루터와 칼빈이 주장한 문자적, 문법적, 문헌학적 성경 주해의 우선권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특별히 종교 개혁가들이 반대한 것은, 구약에 대한 알레고리 해석과 로마 가톨릭이 알레고리 해석을 통해 그들의 교리를 강화시키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문자적”이라는 말은 “알레고리”적 이라는 말과 직접적으로 배치된다. 이는 루터와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의 지상 명제였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알레고리 해석에 빠져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최근의 신학적 조류에 있어서 근본주의가 문자주의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데, 우리가 “문자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이런 맥락이 아님을 밝혀둔다. 이 말은 사실 다소 모호하다. 어떤 학자들에게는 “문자적”이라는 말이 “축자주의”를 의미하는데, 근본주의자들을 문자주의자들이라고 말할 때에는 바로 이런 개념이 사용된다. 또 다른 이들은 신학에 있어서 정통주의가 하나의 문자주의라고 말해왔는데, 이는 정통주의가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에 거의 마술적이고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해 왔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한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빈도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평상적으로 “곰”이라고 하면 문자적 의미 그대로 짐승인 곰을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미련한 사람을 곰이라고 은유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모두 짐승인 곰을 곰이라고 부르는 것의 세 배만큼이나 자주 미련한 사람을 곰이라고 부르게 되면, 이 단어의 평상적인 문자적 의미는 “미련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떤 단어를 명사나 동사, 또는 형용사 등과 관련시키는 것을 지시라고 부른다. 모든 언어는 특정한 지시의 체계를 갖고 있다. 언어는 또 여러 지시 단계들을 반영한다. 일상적 대화는 통속적이고 평상적이며 상식에 속한 지시를 반영하는 반면, 예컨대 물리학에 대한 강의는 전문적 지식을 반영한다. 해석학 이론에서 “문자적”이라는 말은 이 지정의 과정의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관습적이고 통상적인 사회화된 지시를 가장 기본적 범위로 삼는다. 그러므로 한 단어의 문자적 의미란 그 언어에 축자되어 온 그 단어의 지시를 가리킨다.

 


조금 오래된 해석학 책들은 유수스 로쿠엔디(usus loquendi;대화체에서의 사용, 통상적 사용)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대화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개념을 나타낸다. 해석학 이론의 발전을 고려할 때, 지시라는 단어가 유수스 로쿠엔디보다 현대적인 구문론적 용어이다.

단어 또는 문장의 문자적 의미가 기본적, 관습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지시된 의미라고 할 때, 우리는 언어의 복합성을 간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지질학에서 충상(衝上), 단층 그리고 반충(反衝)에 해당하는 구조들이 언어의 구조 속에서도 관찰된다. 언어는 수세기에 걸친 오랜 사용을 통해 침식과 생성을 거치면서 층이 형성된다. 따라서 언어의 문자적 의미를 우선적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고 할 때, 이는 언어의 복잡성을 염두해 두면서 하는 말이어야 한다.

 


언어의 영적이고 신비적이며 알레고리적, 혹은 은유적 사용은 그 언어ㅢ 문자적 의미 위에 쌓여진 의미를 층들을 반영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고지식한 문자주의”나 말 그대로 “축자주의”를 따르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문자적 해석은, 한 문서를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문서의 통상적이고 일반적, 관습적 그리고 전통적 지시의 범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요구한다.

 


혼(Horne)의 문자적 해석이라 할 때, 이 문자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아주 탁월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더 나아가, 사려 깊고 주의 깊은 사람에게는, 그가 쓰는 글이나 하는 말이 하나 이상의 다양한 의미를 갖도록 일부러 의도하지 않는 것이 상식적이다. 따라서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이나 말을 듣는 청중 모두는 그 참되고 명백한 의미 외에 다른 것을 붙이지 않는다......문자적 의미란 성경의 어느 곳에서든 그 단어들의 나타내는 혹은 요구하는 의미, 즉, 그 어떤 문체(수사적 표현)나 은유 그리고 신비적 의미로부터 끌어낸 유추가 가미되지 않은 자연스럽고 적절한 의미를 가리킨다.

 


크레이븐의 탁월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확한 개념을 보다 잘 드러내는 단어로서...‘정상적’이라는 말이 문자적이라는 말대신 사용되어야 한다. 사실, 예언서 해석에 있어서 서로 크게 다른 두 학파를 지칭할 때 문자적 그리고 영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더할 수 없이 부적절한 표현이다. 이 용어들은 서로 상반된 개념일 뿐 아니라, 그 용어가 표방하는 각 해석 체계의 특징들을 제대로 대표하지도 못한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혼돈을 유발하기 십상이다. 문자적이라는 용어는 영적이라는 용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이라는 용어와 대조된다. 영적이라는 용어는 한편으로는 물질적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 의미로서의 육적이라는 말과 대조된다. 하지만 문자주의자는 ... 비유 언어, 즉 예언에 사용되는 상징들을 부인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 안에 깊은 영적 진리들이 담겨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의 입장은 단지 예언들이 정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즉 다른 모든 경우들처럼 언어의 법칙을 따라 자연스럽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문자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또 비유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은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영적 해석주의자들의 입장은 ... 사실 이 말에 의해 제대로 표현되고 있지 못하다. 그는 어떤 부분들에 있어서는 신비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따라서 예컨데, 메시아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로 묘사된 부분은 정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지만,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을 때는 영적 혹은 신비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두 학파의 입장을 제대로 표현해 주는 용어는 정상적 그리고 신비적이다.

 


위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 강조점이 “자연스러운” “절적한” “명백한” “정상적인” 등의 표현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은 유수스 로쿠엔디나 언어의 의미론적 지시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들이다. 이것은 단어의 독특한 암시나 단어의 유희나, 감추어진 은유들, 수사적 표현 그리고 한 단어가 가질 수 있는 여러 의미층을 이해하지 못하는 축자주의가 아니다. 또한 이것은 정통주의나 근본주의자들, 혹은 보수적 해석학의 특징이라고 함부로 남용되는 소위 “고지식한 문자주의”도 아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우리의 해석학은 종교 개혁가들의 해석학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종교개혁자들이 노예적 문자주의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칼빈 자신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글자에 매인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 대단한 박사님들은 문자적으로 나타내어진 바에 단 한치도 벗어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만일 이런 식의 해석을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면, 신앙의 모든 빛은 이 조야한 야만성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기독교 강요 4, 1, 23).


 

성경해석의 문자적 기초를 변호하는 뜻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해석에 있어서 문자적 접근은 다른 모든 문학서의 해석에 있어서도 통상적 관행이다. 책이나 논설 혹은 시를 읽을 때, 그 글의 문학적 장르가 우리를 해석의 다른 차원으로 이끌기 전에는 우선적으로 그 문자적 의미를 찾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온갖 형태의 문학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문자적 의미가 아닌 다른 차원의 의미들은 언제나 이 문자적 의미가 가장 우선되는 의미층을 형성하며, 모든 문학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필수불가결한 출발점이 된다. 만일 어떤 동양의 신비 문학서를 읽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이런 문자적 해석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정당치 않은 방법이라고 판명되면 신비적, 알레고리적, 또는 은유적 해석 방식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본질적 성격을 이런 저런 식으로 속단함이 없이(거기에 보다 깊은 의미가 모형론적으로, 알레고리적으로, 신비적으로, 혹은 실존적으로 표현되어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우리는 우선 문자적 혹은 문헌학적 해석의 견지에서 접근해야 한다.


 

2. 모든 부차적 의미들은 언어의 문자적 의미층에 의존한다. 비유, 모형, 알레고리, 상징, 수사학적 표현, 신화 그리고 우화 등은 이들을 형성하는 의미층이 있기 전에 어떤 문자적 의미층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문자적으로 “농사 짓는 일”에 관련된 용어들을 다룰 때에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또 사자가 상징하는 바는 문자적으로 사자에 관해 말해지는 바에 근거한다. 기도의 상징으로서의 향은 일상 생활 속에서 향을 사용하는 예들을 통해 이해되며, 또 일상적 대화 속에서 말해지는 향의 의미를 따라 표현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아브라함이나 사라 그리고 하갈에 대해 말한 그 모형론적 혹은 알레고리적 해석은, 이 인물들에 관해 언어의 문자적 의미층을 반영하는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진술들에 근거한다. 따라서 모든 비문자적 진술들이 보다 원래적인, 보다 원초적인 문자적 의미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문자적 주해는 성경이든 성경 이외의 문서들이든 간에, 모든 해석의 출발점이다.


 

3. 문자적 해석을 최우선의 원칙으로 삼을 때에만, 성경의 주해적 남용 또는 오용을 막을 수 있다. “성경의 주석적 남용 또는 오용”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교회사와 또 이교사에서 일종의 알레고리 방식(성경의 이중적, 삼중적 혹은 사중적 의미를 찾는 식의 모든 해석들)으로 성경에 없거나 비성경적 생각들을 성경 속에 집어넣어 해석해 온 관행들을 가리킨다.

성경의 알레고리 해석의 역사를 보면, 성경에 문자적, 역사적 혹은 문법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으나 무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문자적 해석은 “육적” 또는 “피상적” 성경 이해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을 행함에 있어서 알레고리주의자들은 그들이 알레고리 해석을 하기 위해 사실상 얼마만큼의 문자적 해석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


더 나아가, 다른 많은 종류의 영적 또는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들이 있어 왔다. 교회 교부들은 구약에서 교회의 교리들을 찾아내기 위해 알레고리를 무절제하게 사용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구약으로부터 그들의 성례전이나 계급적 교회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몇 가지 형태의 알레고리 해석들을 사용했다. 비록 어떤 이교들은 이상야릇한 알레고리들을 개발했다. 수세기에 걸쳐 복음서의 비유들은 적절히 이해되지 못했는데, 이는 문자적이 아니라 늘 알레고리로 접근해 왔기 때문이다. 그 많은 알레고리 해석들 가운데 어떤 것을 정당한 해석으로 고를 것인가? 사실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즉, 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최우선적 권한을 부여하고 이 문자적 의미로 하여금 제시된 다른 알레고리들이나 신비적 해석들을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누구든 그의 신학을 성경의 부차적 의미층에 기초시키는 사람은 사실 상상에 의한 해석을 끌어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상상력을 통해 들어오는 해석들은 불행하게도 비성경적 생각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성경의 의미를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해석의 닻을 문자적 주해에 드리우는 길뿐이다. 문자적 해석은 축자주의의 소용돌이와 알레고리의 괴물이라는 진퇴양난의 풍랑 속에서 헤어나는 유일한 대책이다. 문자적 해석은 성경의 바른 해석을 보호하기 위한 효과적이고, 의미 있으며, 또 필수 불가결한 제어 장치이다. 사실 이보다 더 강력한 주장을 할 수 있다. 즉, 문자적 해석이라는 울타리를 통해 성경을 지켜 내야 하는 것은 신학자나 해석자의 “의무”이다.

 


문자적 해석의 우선권이라는 지침이 잘못 이해될 수 있는 세 가지 방식들이 있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어의 수사학적 표현이나 상징들, 모형들, 혹은 알레고리를 간과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문자적 해석은 흔히 비난받듯이 눈먼 축자주의나 고지식한 문자주의가 아니다.

2. 해석학에 있어서 성경의 축자 영감설을 믿는다는 것이 곧바로 축자주의나 고지식한 문자주의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런 비난이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우나 그런 일이 신학 논쟁 가운데 자주 있어 온 것은 사실이다. 성경의 축자 영감설을 믿는다는 것이, 해석자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을 완전히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축자 영감설이란 성경의 기원에 관한 이론으로, 그 자체로서는 해석학의 이론에 관해 아무것도 결정해주는 바가 없다.

하지만, 축자 영감설과 문자적 해석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일단의 아주 정통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자적 해석”이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들은 이 방식 이외의 다른 모든 해석 방식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는” 해위로 간주한다. 그들의 의도는 참된 것이나 성경이 어떤 식으로 보호되고 지켜져야 하는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순진한 동시에 잘못된 것이다.


3. 성경에 관한 것이든 다른 문서들에 관한 것이든 해석학에 대한 모든 논의들 배후에는 매우 고도화된 언어 이론들이 있다. 근대철학분야에 있어서 언어데 대한 이론은 주요 주제로 등장했다. 이미 이런 언어 이론에 접한 경험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문자적 해석에 대한 우리의 변화가 언어의 문자적 차원에 대한 단순한 확정 정도로 보일 것이다. 우르반이나 카시러처럼 이 분야에서 앞서 가는 선구자들은 은유 혹은 “죽어버린 은유”가 과연 어느 정도만큼 언어의 문자적 차원을 침투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우리는 언어에 따른 이러한 추가적인 복잡한 요소나 비엔나 학파에서 연구되고 있는 언어의 보다 새로운 개념들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이 책의 실용적 목적을 고려해 볼 때 불필요한 것이다.

 


<성경 해석학>, 버나드 램, pp.167·-176, 생명의 말씀사.

 

 

 

 

알레고리 해석 / 성경해석

 

 

   

목 차

 


 1. 알레고리 해석


   1) 성경해석의 역사


   2) 알레고리 해석이란


   3) 알레고리 해석의 문제점


   4) 알레고리 해석의 장점


   5) 알레고리 해석의 형성 과정

 

 

2. 알레고리 성경 해석의 역사


   1) 1세기의 성경해석 방법


   2) 교부들의 성경해석 방법


   3) 중세시대의 성경해석 방법

 

 

3. 결 론

 


참 고 문 헌

 

 Ⅰ. 알레고리 해석

 

1) 성경해석의 역사

 일반적으로 성경해석의 시작을 에스라(B.C.457) 때로 잡는다. 그 이유는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서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라고 한 느헤미야(8:5-8)의 기록에 근거해서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로 인하여 히브리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에스라와 그를 돕는 자들이 히브리어 본문을 해석하여 아람어로 크게 읽었고, 여기에 설명을 덧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이러한 성서해석은 후일에 바리새주의적인 성경해석의 길을 터놓게 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 이후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뜻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경향은 점차 율법을 이중적으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고 문자의 숫자까지 세어서 의미를 찾고자 했다. 즉 해석자가 주어진 본문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 것이다. 성서해석자들이 성서의 본문을 이같이 해석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많은 성서 구절의 보편적이며 영원한 의미가 그 저자의 원래 의도와 다른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또한 본문이 교회의 교훈을 위하여 충분하다고 인정하지만, 동시에 독자가 놓인 시대적 상황의 요구가 과거의 요구와 차이가 있을 때, 본문과 현대의 사상 및 생활을 관련짓는 어떤 방법이 발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성서해석 방법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안디옥 학파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 문자적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중심으로 한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역사비평 이후의 성서해석은 거의 역사적, 문자적 해석에 치중하였고, 역사적 해석 방법만이 유일한 것처럼 주장하게 되었다. 반면 알레고리적 해석은 등한시되고 심지어는 위험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2) 알레고리 해석이란

 알레고리 해석은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고 상징적 의미를 찾으려는 해석이다. 성서해석에 알레고리적 해석법이 많이 쓰이는 이유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단순한 문자적 의미를 넘어 신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알레고리 해석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해석법이다. 플라톤은 참된 실체란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놓여 있다고 하였다. 이런 가르침이 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외견상으로 보이는 문자적 의미보다 그 이면에 있는 의미를 찾도록 영향을 미쳤다. 이 해석법은 당시의 일반 문학을 해석하는 데도 많이 사용되었다.

 

 3) 알레고리 해석의 문제점

 알레고리 해석의 문제점은 본문의 접촉점과 설교의 접촉점의 공통분모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다. 설교자가 알레고리 해석의 함정에 쉽게 빠지는 일차적인 이유는 본문의 의미를 오늘의 상황으로 문자적으로 가지고 오면, 그 문자적인 의미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전혀 그 의미를 올바로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문의 문자적 의미가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자는 본문의 의미를 오늘의 상황에서도 유효하도록 하기 위하여 본문에 알레고리의 의미를 덧붙인다. 그렇게 본문의 접촉점과 무관한 의미들이 덧붙여지고 오늘의 상황 속으로 들어와서 본문이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알레고리 해석에서는 본문에 담긴 접촉점이나 당시의 구속사적인 시대적 정황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들 속에서 오늘의 설교에 필요로 하는 영적 혹은 윤리적 적용점만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덧붙여지는 의미들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사기 7장에서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와 전투해서 승리를 거두는 과정(삿7:19-23)을 해석할 때 알레고리 해석으로 덧붙인다면, 횃불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항아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가로막는 내 아집과 교만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은 교만의 항아리를 깨부술 때 비로소 역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밝게 빛을 발하는 순간, 우리는 나팔처럼 담대하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도하며 입술로 고백하고 찬송함으로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알레고리 해석법은 본문이 역사적 배경과 문맥, 그리고 문자적 표현을 통해 명백히 가르쳐 주는 내용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본문의 요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 통일된 의견이 없고 자의적 해석이 많아서 주관적인 경향을 띤다. 따라서 그 해석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어렵다. 알레고리적 해석의 대표격인 오리겐마저도 자기 해석의 정확도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사기의 기드온 예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알레고리 해석은 본문의 고유한 의미를 상실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탕자의 비유(눅15:11-32)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것에 비난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비유다. 그런데 이것을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큰 아들은 유대인, 작은 아들은 이방인으로 보며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가는 구속사로 보여 주는 비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본문의 핵심 메시지인 죄인을 받아들이고 용납하라는 메시지가 상실되는 것이다.

 

 

 4) 알레고리 해석의 장점

 장점은 본래 문자적 의미를 전하지 않는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알레고리적 해석의 거두인 오리겐이 알레고리 해석을 주장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은유, 예화, 비유 등을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알레고리 양식의 본문을 해석 할 때 유익하다는 장점을 또한 가지고 있다. 이런 본문으로는 비유가 많은데 비유는 무조건 상징적 의미가 하나인 직유나 은유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교부시대로부터 역사비평이 등장 할 때까지 알레고리 해석이 주류를 이루며, 해석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역사비평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알레고리 해석을 배척했으나, 이것은 부당한 일이다. 성경에는 여러 비유를 비롯하여 알레고리 양식의 글도 많이 있다. 이런 글은 알레고리 해석법으로 해석해야 옳다.

 대표적인 본문으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막 4:1-20)와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막 4:26-29), 겨자씨 비유(막 4:30-32), 그리고 악한 농부의 비유(막 12:1-12), 가라지 비유(마 13:24-30)등이 있다.

 

 

 5) 알레고리의 형성 과정

 '알레고리(Allegory)'라는 용어는 헬라 수사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초적으로는 '일련의 은유들'을 의미했다. 이 방법은 헬라인들이 그들의 종교적 신화의 전통과 헬라적 유전의 상충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전시켰다. 헬라의 종교적 신화는 그들이 용납할 수 없는 부도덕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헬라 철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알레고리화시켜 사고의 모순점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신화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문자 뒤에 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알레고리는 하나의 확대된 은유로서 모든 세부 항목들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것을 지칭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직유나 은유가 한아의 주요 비교점을 갖고 있는데 반해서 알레고리는 여러 개의 비교점을 갖게 된다. 알레고리의 주된 형식적인 특징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각 이미지와 세부 사항이 자체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알레고리적 이야기와 그것이 나타내려는 것 사이에는 수많은 관련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가장 유명한 알레고리로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들 수 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지명들은 알레고리 해석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기독도는 고유명사인 동시에 일반 기독교인이며, 자명성은 장차 망할 성을 뜻한다. 이 이야기에서 사용된 이름들과 지명들에 관심을 갖지 않고서는 이 이야기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알레고리 속에서 인명이나 지명은 단순히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알레고리적 해석은 유대교나 기독교에 속한 헬레니즘 사상에 영향을 입은 학자들에 의해 성서해석에 도입되었다. 이 해석법은 실제적 경험이나 비실제적인 경험을 활용하여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는 형태로 성경이 문자적 의미 이상의 참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에 그 기초를 둔다. 이의 대표적인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이다. 그는 이스라엘 신앙이 헬레니즘 철학과 모순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구약의 본문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다. 우리는 신약성서에서도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신약성서의 알레고리의 본보기는 마가복음 12:1-11, 마태복음 13:24-29, 36-43, 마태복음 22:1-14, 마가복음 4:3-9, 13-20 등이다.

 

 

 

  2. 알레고리 성경 해석의 역사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서해석의 역사는 크게 두 흐름으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안디옥 학파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 문자적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중심으로 한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본 고의 목적은 이러한 흐름을 모두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의 가능성을 진단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이 연구 목적과 관련 있는 알레고리적 성서해석 방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논문의 한계상 역사비평 이전 시대로 한정하겠다.

 

 


 1) 1세기의 성경해석 방법

 예수 당시 유대교의 성서해석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문자적 해석 방법이다. 성서본문의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다른 해석 방법의 기초적인 역할을 했다. 이 해석의 대표적인 학파로는 샴마이(Shammai) 학파와 힐렐(Hillel) 학파를 들 수 있다. 이 두 학파 중 샴마이 학파가 좀 더 엄격한 문자적인 해석을 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샴마이 학파는 신명기 6:7의 본문을 해석하면서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에든지'라는 구절의 문자적인 의미를 중시 여겨 율법을 암송할 때 저녁에는 기댄 자세로 암송하고 아침에는 선 자세로 암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힐렐 학파는 '길에 행할 때에든지'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좋은 방법으로 암송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둘째는 미드라쉬(midrash) 해석 방법이다. 이 해석법은 힐렐이 발전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이 해석 방법의 기본 법칙은 여러 본문에 나오는 사상, 용어, 구절을 비교하는 것이며, 일반적인 원칙을 특별한 경우에 적용시키는 것이고, 또한 해석에 있어서 문맥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해석은 표면적으로 그 출발점이 성서본문이며 인정된 해석 법칙에 의해 성서 안에 감추어진 뜻을 설명하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당시대의 백성들에게 맞도록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심은 후대에 성서본문을 상상적 내지 창조적으로 취급하게 되는 경향을 가져오게 했다.

 


 셋째, 페쉬(Pesch) 해석 방법이다. 페쉬는 아람어에서 왔으며 '해결' 혹은 '해석'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해석 방법의 예는 쿰란 공동체의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쿰란 공동체는 고대 선지자가 기록한 모든 것은 감추어진 예언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 예언들이 자신의 언약공동체를 통해 곧 성취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페쉬 해석 방법은 미드라쉬에서 대부분 빌려 온 것이지만 여기에는 종말론적 강조가 내포되어 있다. 그들은 구약의 어떤 예언이 자신들의 경우에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현재의 현상은 저 고대 예언의 성취이다'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뜻으로 '이것은 저것이다'라는 표현으로 페쉬 방법이 설명된다. 넷째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이다. 예수 당시에는 모세의 전통에 충실하기를 원하면서도 헬라 철학을 용납하는 유대인들이 그 둘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모세의 전통을 알레고리화시켰다. 필로는 이런 해석 방법의 대가였다. 그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이해의 단계가 미완숙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믿었다. 그는 풍유적 의미가 보다 완숙한 단계의 의미로 생각했다.


 

 여기서는 알레고리적 해석에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좀 더 자세히 이 성서해석 방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알레고리적 해석법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중의 하나는 아리스토부르스(Aristobulus)와 필로였다.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문헌은 아리스토부르스의 단편과 아리스테아스(Aristeas)의 편지이다. 아리스토부르스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으로 소요학파 철학자였다(기원적 160). 그는 모세의 책에 대한 주석가로 유명한데 그것의 단편들은 유세비우스에 의해 보존되어 있다. 이 작품의 진위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아리스토부르스의 단편의 진위성이 어쨌든 그의 작품은 해석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들 중의 하나이다. 그의 견해는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그가 제시한 두 명제는 그 후에 주석 분야에서 많은 그릇된 결론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그가 제시한 첫 번째 명제는 헬라 철학이 구약성서 특히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빌려 온 것이라는 진술이다. 많은 헬라 철학자,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의가 모세와 예언자들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부르스는 알렉산더 시대 이전에 율법의 많은 부분이 헬라어로 번역되었으며, 플라톤과 심지어는 피타고라스까지도 주로 그것으로부터 빌려 썼다고 주장했다. 오경으로부터 헬라 철학이 나왔을 두 번째 가능성으로 신인동형론적 표현의 수정에 의해, 그리고 고대 문서들의 라인들 사이에 새로운 개념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 또한 거짓 아리스테아스(Pseudo-Aristeas)의 편지에도 깨끗한 짐승과 더러운 짐승을 구별하는 데 정결예식에 대한 언급에 있어 알레고리적 경향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그는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즐겨 사용하여 해석했으나 모든 본문을 알레고리로 하지는 않았고 상당히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아리스토부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알레고리적 해석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예수 시대에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한 유대인으로 그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의 저작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다. 아마 현존하는 그의 저작들을 완전히 발행한다면 적어도 로브 편지판으로 12권이 넘을 정도이며, 제목만 알려진 논문들도 상당히 많다. 필로는 초기 기독교 주석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주로 세 주석학파들이 활동을 했다. 첫째는 문자주의자(literalist)이다. 이들에 대해서 필로는 우위성을 가지고 말한다. 다음은 유대주의로부터 나온 이성주의자들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슬픔과 분노를 가지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알레고리적 해석가들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미 어떻게 유대 제도와 헬라 문화를 조화시킬 것인가의 비밀을 배웠던 자로 높이 평가한다.


 필로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성서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성서본문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문자적 혹은 명백한 의미와 숨겨진 의미이다. 숨겨진 의미는 여러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알레고리이다. 필로는 알레고리적 해석은 많은 불명료한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고 생각했다. 필로는 제한 없이 알레고리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에게는 성서의 모든 것, 곧 이름들, 날짜들, 숫자들, 심지어는 역사적 사실들과 사람들의 행위까지도 알레고리적 해석의 대상이었다. 그는 문자적 의미는 약하고 무지한자들을 위해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문자적 의미를 밝히는 대신에 이것을 철학적 상징으로 변형시켰다. 그는 문자와 알레고리적 의미를 육체와 영에 비교했다. 그의 주석은 왜곡된 매체를 통해 굴절시킨 구절들이 매우 많다. 반면 매우 단순한 이야기에서조차 평범한 의미를 그대로 두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필로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자연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의 이중으로 구별하였다. 성서본문 중 하나님과 세계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으로 분류했으며, 인간의 의무에 관해서 설명하는 것은 '윤리적'이라고 하였다. 필로에 의하면 알레고리적 해석의 필요성은 성서 자체가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눈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 친근한 방법인 알레고리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야 한다. 실제 성서는 아주 확실하게 우리에게 이 방법의 사용을 위한 단서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말하기를 에덴동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무들과 전혀 같지 않는 나무들이 있었는데 생명의 나무, 영생, 지식, 이해, 선과 악의 개념의 나무들이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한다. 필로는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성서는 하나님의 작품이기에 모든 표현, 모든 단어, 모든 문자는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성서를 '거룩한 말씀', '신적 말씀', '옳은 말씀'으로 간주했으며 성서가, 플라톤으로 빌려 온 이론에 따라 황홀경의 상태 곧 인간의 능력이 온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쓰였다고 상상했다. 예언자들의 언어 기관이 완전히 신의 복화술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이해했다.

  곧 성서를 역사적인 책으로는 간주하지 않고 신의 구술에 의해 받아 쓰인 책으로 생각하여 모든 구절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필로의 해석 법칙을 정리해 보자. 첫째, 문자적 의미를 배제하는 규칙은 주로 스토익적이다. 만일 성서에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숨겼다'는 표현이 있다면 이는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진술이므로 알레고리로 보아야 한다. 야곱이 그의 종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들을 찾기 위해 요셉을 보냈다든가, 가인이 아내를 가지고 있다든가, 또한 도시를 세웠다든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유업이라든가, 아브라함이 야곱의 증조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대신 조상이라 불렸다면 이것은 서로 모순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절들은 알레고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알레고리와 문자적 의미가 동시적으로 존재함을 증명하는 방법은 주로 랍비적이다. '아브라함, 아브라함'이라는 반복되는 표현이 있다면, 이같이 두 번 이름을 부르는 것은 처음은 애정이요, 두 번째는 경고이다. '먹고 먹으리라'와 같이 같은 단어가 반복되는 것은 먹는 것에 영적이며 의식적인 지식이 함축된 것이다. 셋째, 낱말들은 구두점과는 관계없이 설명되어야 한다. 미드라쉬에서는 이같이 표현함으로 야곱이 거짓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나는 <야곱이다: 그러나 에서는> 장자이다. 넷째, 동의어가 사용되었다면 이는 어떤 알레고리적인 것이 의도된 것이다. 창세기 1:27의 '만들다'(made)와 2:8의 인간을 '짓다'(moulded)에서 첫 번째 단어는 지상적인 인간을 의미하고, 두 번째 단어는 천상적인 인간을 의미한 것이다. 다섯째, 언어의 유희는 깊은 의미를 연역하기 위해 받아들여졌다. 여섯째, 분사, 부사, 전치사는 알레고리의 도구가 되었다. 문장의 부분들은 의미가 있다. 각각의 단어는 문맥과는 별도로 자체의 가능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필로의 이러한 해석법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것의 의미를 흐리게 했고 불명료한 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약점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필로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사용해 무엇을 밝히려고 애썼는가이다. 그는 학설의 기본 성격은 변증적이다. 그의 생각으로 정당하게 이해된 유대교의 많은 사상은 헬라 철학이 갖는 지고의 사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 선민에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와 별로 큰 차이가 없는 방법으로 자신을 헬라 사람들에게 제시하셨다. 그러므로 필로는 철학자의 하나님과 헬라적 인간의 세계동포주의 편에 서서 액면대로의 신인동형동성설(anthropomorphism)이나 이스라엘의 배타성을 설명해서 처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의 해석 방법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1세기의 성서해석자들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임에는 의견을 같이 했다. 그들은 이 말씀들이 현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문자적 해석은 법정적이거나 실제적 관심의 분야에서 사용되었으며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힐렐의 영향으로 미드라쉬 방법의 해석을 했고, 또한 많은 해석자들이 온건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구전을 성서에 더 밀접히 관련시키기 위해 미드라쉬적인 해석을 발전시켰고, 쿰란공동체는 자신들이 성실한 남은 자들이라고 믿는 나머지 미드라쉬 방법과 페쉬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했으며, 필로와 그 동료들은 성서와 헬라 철학을 조화시키기 위해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2) 교부들의 성경해석 방법

 교부들의 해석 방법은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역사적 문자적 해석이요, 다른 하나는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학파는 안디옥 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이다. 그러나 이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알렉산드리아 학파라고 해서 알레고리적 해석만 하는 것도, 안디옥 학파라 해서 알레고리적 해석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이를 구별하여 다루지 않고 주요 교부들이 알레고리적 성서해석 방법을 어떻게 평가하고 사용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의 교회는 이단들의 다양한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교회의 전승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교부들은 많은 노력을 했으며 당연히 이 노력은 성서의 해석에 집중되었다. 이레니우스(Irenaeus)는 그의 저작 <이단 반박>에서 일관되게 이단의 성서해석을 공격했다. 그는 이단들의 그릇된 해석은 본문의 전후 맥락―문학적이든 역사적이든―을 무시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는 교회가 일정한 성서해석의 원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의 규칙이나 진리 체계란 성서를 바로 해석하게 하는 일련의 원리였다. 이 원리는 직접적인 권위를 가지는데 그 이유는 이 원리가 경전에 담겨있는 내재적인 진리, 전승, 합법적인 계승자와 교리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성서해석의 관심은 역사적 문자적 의미를 찾는 데 있었으나 알레고리적 해석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는 곳곳에서 여전히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고 있다.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의 대표적인 예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마 20:1-16)이다. 그의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맨 처음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시작에 부른 사람이며, 두 번째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옛 계약 하에서 산 사람들이고, 세 번째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중간 시간 후, 즉 예수의 사역 시대에 참여한 사람들이며, 네 번째로 부름을 받음 사람들은 이레니우스와 동시대의 사람들이고, 마지막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시간의 끝에 참여할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또 포도원은 의를 상징하는 것이며,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고, 데나리온은 영원불멸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지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그가 알레고리적 해석을 인정하고 때로 상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극단적이 아닌 알레고리적 해석은 용납했다. <마르시온 반박>에서 그는 알레고리의 사용을 이론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그가 알레고리적 해석법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이레니우스의 경우와 같이 마르시온주의자들 때문이었다. 구약을 단지 문자적 의미로만 이해하여 신구약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그들과 대항하여 구약을 경전으로서 해석하는 데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은 좋은 도구가 되었다. 예를 들면 그는 예수가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의 모습으로, 또는 다니엘서의 화로 속에 나타난 세 젊은이들의 모습으로 구약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유형적 또는 알레고리적 해석법은 일차적으로는 변증이 그 목적이었다. 그러나 터툴리안은 이단들이나 이방인들이 알레고리적 방법을 남용 내지는 악용하는 사례들을 목격하고 이 방법에 회의를 가지기도 했다. 그는 해석은 현실적 감각과 절제를 기초로 한 일반상식에 배치되지 않아야 한다는 지론으로 문자적 의미를 선호했다. 그래서 그는 문맥에 맞추어 원래의 의미를 찾는 데 더 비중을 두었다.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의 예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탕자의 비유(눅 15:11-32)이다. 터툴리안은 탕자의 비유를 해석하면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둘째 아들은 기독교인을, 낭비한 재산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연적 능력과 지혜를, 먼 나라에 있는 시민은 마귀를, 돼지는 귀신을, 옷은 아담이 그의 타락을 통하여 상실한 아들의 신분을, 반지는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잔치는 성례전의 성만찬을, 송아지는 성만찬에 임재한 구세주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이같이 터툴리안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적극적으로 선호한 것은 아니지만 이 방법을 용납했고 변증적 목적을 위해서는 기꺼이 사용했다.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선호한 또 한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이다. 클레멘트는 성서해석의 기술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사람이었다. 그는 헬라철학의 신적 기원을 믿었으며 성서가 참 뜻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서의 감추어진 의미는 모든 사람을 위해 적합하지 않고 단지 참 지식을 위해 선택받은 완전한 기독교인들을 위해 적합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성서본문에는 다섯 가지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이론화시켰으며 가장 심오한 의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밝혀지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한 다섯 가지의 의미는 역사적 의미, 교리적 의미, 예언적 의미, 철학적 의미, 그리고 신비적 의미이다.

 클레멘트의 창세기 22:1-4의 해석은 해석법을 잘 드러내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장소에 셋째 날 도착했을 때 그는 눈을 들어 저 멀리 저 장소를 보았다. 왜냐하면 첫째 날은 좋은 것들을 보는 것으로 구성되었으며, 둘째 날은 영혼의 가장 좋은 소망이며, 셋째 날에는 제 삼일에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이해의 눈이 열려져 마음이 영적인 것들을 감지하게 된다. 3일 동안은 하나님을 진실로 믿게 되는 인봉(세례)의 비밀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멀리서 그 장소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플라토가 이데아의 영역이라고 부른 하나님의 영역은 모세가 모든 것을 우주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장소라고 말한 것처럼 얻기가 힘든 영역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멀리서도 보였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세대의 영역 안에 있었으며 천사에 의해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지식의 그런 순전하고 영적인 작용에 의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라고 말한다.

 

 알레고리적 해석의 대가는 오리겐(Origen)이다. 오리겐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불행하게도 아버지 레오니다스가 주후 202년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박해 시에 순교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때 그도 순교하려 했으나 어머니가 옷을 감추는 바람에 순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주후 250년 데시우스 박해 때에 순교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평생에 60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고 전해지며, 책명이 알려진 것만도 800여 권에 달한다. 그 가운데 중요한 저서로는 기독교 최초의 조직신학 저서로 알려진 <제일 원리>, 이단 반박의 변증서로서 <켈서스 논박>, 그리고 성서의 여러 편집본을 비교 분석하면서 연구하였던 <헥사플라>가 있다.

 오리겐은 220-225년 사이에 그의 주 저서인 <제일 원리>De Principiis: on the First Principle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성서해석의 대원칙을 분명히 밝혔다. 그가 말하는 성서해석의 원칙은 대전제로서의 성서의 영감, 그리고 성서해석의 목적으로서의 최종적인 구원과 성서해석의 방법으로서 영적인 해석이다. 그는 성서가 알레고리로 차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의 최초의 주석인 <아가서 주석>에서 그는 이 원칙에 호소했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에 따라서 판단한다는 원칙을 내세워서 이 지사의 것들은 원형인 천상적인 것들의 현상과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 천상적인 것들은 또한 원형인 하늘나라와 연결시켜서 보려고 하였다. 그는 공개적인 것은 감춰진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원칙을 주석에 적용시켜서 아가서에 언급되어 있는 가시적인 수노루와 수사슴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상적인 실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연결은 그것들의 신체적인 본성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하였으며, 우리는 감추어져 있고 또한 보이지 않는 수사슴에 비견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수사슴을 적절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오리겐은 가시적이며, 공개적이며, 지상적인 것들을 불가시적이며 감추어져 있으며 천상적인 것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전자에 속하는 것들은 항상 후자에 속하는 것들로 이해되어 가는 과정에서 완성된다고 하였다.

 오리겐은 그의 <제일 원리>에서 성서는 영감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문자적 해석만 고집한다는 것은 옳지 않으며, 영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성서의 신비를 푸는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하였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적 우주관에 근거해서 영적인 하나님이 악한 물질세계를 창조하였다고 생각할 수 없음으로 천지를 창조한 신은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며, 악한 데미우르지(Demiurge)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악한 신의 창조를 기록한 구약성서를 전체적으로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비슷한 맥락에서 마르시온주의자들도 구약성서를 배격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그는 영지주의의 이원론적 사상을 배격하고, 또 신구약성서의 상호 연결성을 말해 주었다는 점에서 초기 교회에서 이단 사상을 물리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오리겐은 알레고리적 성서해석 방법을 사용해 구약과 신약의 서로 연결시켰으며 초대 교회에서 영지주의의 이원론과 같은 이단 사상을 물리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성서학자 중의 하나는 제롬(Jerome)이다.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아람어, 시리아어도 잘 알았다. 그는 불가타의 번역자로뿐만 아니라 아람어, 시리아어도 잘 알았다. 그는 불가타의 번역자로뿐만 아니라 성서주석가로 유명하다. 그는 구약의 거의 모든 주석과 신약의 복음서, 서신들에 관한 수많은 주석을 썼다. 그의 첫 번째 주석은 <오바댜서 주석>이다. 그는 주로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으로 본문을 주석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는 이것이 그의 젊은 시절의 작품이었고 이 같은 해석을 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변명을 했다. 제롬은 초기에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격찬했으나 후에 이 해석의 약점을 발견하고 그 해석 방법을 공격했다. 그러나 제롬 역시 알레고리적 해석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으며 여전히 적법한 것으로 간주했고 때로 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어거스틴(Augustine)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마니교도였다. 마니교는 심한 문자주의적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구약 이해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이런 영향을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어거스틴이 마니교도의 극심한 문자주의의 영향 하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암브로스(Ambrose)는 구약의 많은 부분이 알레고리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암브로스의 지도 아래 성서에 대한 어거스틴의 어려움을 해결되기 시작했고, 그가 탐닉했던 신-플라톤주의자의 철학을 요한복음에서 발견함으로써 그 과정에 박차가 가해졌다. 그러나 연수가 지남에 따라 그는 자신의 성서 주석에서 알레고리적인 요소를 감소시켰다. 그의 초기 작품인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ees는 후에 어거스틴 자신까지도 지나치다고 간주할 정도로 알레고리적 해석이 우세했다. 그러나 주후 401-415년에 쓴 12권의 Literal Commentary on Genesis에서는 성서의 창조 이야기와 자연과학간의 불일치들을 해결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어거스틴의 점차적인 성서에 대한 문자적 접근은 그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의 과정에서 성서 이야기에 더욱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또한 실제 단어에 무조건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신적 역사와 예언에 대한 기록으로서 성서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어거스틴의 알레고리적 해석의 근거는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고후 3:6)는 구절이었다. 그는 이 구절에 근거해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요, 알레고리적이나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살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한 예는 선한 사마라이 사람의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은 아담, 예루살렘은 평화스런 하늘의 도시, 여리고는 우리의 죽어야 할 운명을 상징하는 달, 강도들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 옷을 벗기는 것은 그의 불멸성을 빼앗는 것, 그를 때리는 것은 죄를 짓도록 그를 설득하는 것, 그를 거의 죽게 한 후 내버리는 것은 죄를 짓게 하여 영적으로 죽게 만들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 때문에 아직 반쯤 살아있는 것, 제사장은 구약의 제사장 제도(율법), 레위 사람들은 구약의 사역자들(예언자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 상처를 싸매는 것은 죄를 억제하는 것, 기름은 선한 소망의 위로, 포도주는 활발히 일하라는 권고, 짐승은 그리스도의 몸, 주막은 교회, 두 데나리온은 사랑의 두 계명, 주막 주인은 사도 바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돌아옴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이상과 같은 교부들의 해석 방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교부들이 알레고리적 해석보다는 문자적 해석을 선호하는 입장에 있었으나, 성서 내의 모순된 구절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또한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그리고 또한 성서본문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연구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를 찾을 목적으로 알레고리적 성서해석 방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어거스틴 이후 약 1000년 동안 알레고리적 해석이 교회의 주된 해석 방법이 되었다.

 


 

 3) 중세시대의 성경해석 방법

 중세는 창조적인 학문 활동을 하기보다는 초기 교부들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의 성서해석은 전총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알레고리적 해석이 우세했다. 중세의 주된 성서해석의 경향은 성서본문이 네 가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 의미는 문자적 의미(하나님과 조상들이 한 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알레고리적 의미(우리의 신앙이 감추어진 곳을 보여준다), 도덕적 의밀(일상생활의 법칙을 제공해 준다), 신비적 의미(투쟁의 끝낼 곳을 보여준다)이다. 예를 들면, 성서에 나오는 물을 해석할 때 문자적 의미로는 보통 물이며, 알레고리적 의미는 세례의 교리이고, 도덕적 의미는 정결한 생활이며, 신비적 의미는 하늘 예루살렘의 생명수라고 해석한다. 이와 같이 중세의 성서해석 방법은 알레고리적 해석법이라 할 만큼 알레고리가 성행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을 바꾼 중요한 인물은 아퀴나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해석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성서를 계시의 일차적 자료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퀴나스는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였고 알레고리적 해석을 극소화하였다. 사실 알레고리적 해석은 성서 주석에 있어서 의미 있는 방법으로는 아퀴나스에 이르러 거의 종말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그가 알레고리를 철저히 배격했다거나 그의 동시대적 및 그 이후의 성서해석이 결코 알레고리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및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이 대두하면서 알레고리는 더 이상 교부시대나 중세 초기만큼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루터는 성서해석에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성서를 네 가지 의미로 해석하는 중세의 관면을 부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성서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속임수를 쓰는 성직의 사기꾼'으로 비유하였다. 루터는 '성서는 기본적으로 한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문자적 의미이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하기를 문자적 의미가 성서해석에 적합하며 이 방법에는 생명이, 능력이, 교훈이 그리고 기교가 있다. 말의 자연적 의미는 미료하고 난해한 궤변적 공상을 초월하는 여왕이다. 신앙의 명백한 조항 때문이 아니라면 거기로부터 이탈하지 말아야 하면서 성서는 알레고리적이 아니라 문법적,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역사적 문자적 해석을 중요하게 여겨 강조하고 있으나 그의 해석 방법에는 여전히 알레고리의 영향이 남아 있다.

 특히 초기의 그의 성서해석은 주로 알레고리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 한 예는 시편에 대한 해석이다. 그의 초기(초기 시편 강해)와 후기 성서해석 방법 사이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루터는 전반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을 하고 있으나 초기에는 영적인 해석에, 그리고 후기에는 문자적 해석에 역점을 두고 있다. 르페르의 영향을 받은 루터의 초기 시편 강해는 영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 2:6을 강해하면서 시온 산의 형태가 남쪽 끝에서 솟아 있고 그 산 바로 밑에 예루살렘 성이 북쪽으로 기운 채 시온 산을 향해 솟아 있는 모습을 설명하면서 이 기움과 솟음은 그리스도 백성들의 내적인 투쟁, 즉 영과 육의 투쟁을 상징화할 수 있는데, 육체는 북쪽을 향하여 노력하고 영혼은 남쪽을 향해 투쟁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인생의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 두 양태를 표현한다고 했다. 하나는 다른 이들을 위해 세속적인 것을 마련하기 위해 내려갔고, 다른 하나는 천상의 것들을 향해 올라갔다. 또한 이 둘 사이에 성전이 있는 모리아 산이 있는데 시온 산 및 예루살렘 안에 거하는 모리아 산이 예시하는 것처럼 성전은 그리스도이고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양면을 모두 지닌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장소, 즉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위에서 제사 드려지고 지어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지도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희생제물은 그 분을 위해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 해석이 1517년 이후에 쓰인 <일곱 편의 참회 시편 강해>부터는 점차 사라지고, 라이라가 강조한 문자적 해석이 두드러진다. 초기에 쓰인 시편 2편은 다윗이 아닌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강조되었으나 일곱 편의 참회 시편인 제6편에 보면 이것이 다윗 자신의 참회라 설명하고 있다.

 좀 더 흥미로운 사실은 1530년에 쓰인 시편 117편의 강해 중에서 시편 2편을 해석하고 있는데 이 해석과 초기 시편 2편의 해석을 비교해 보면 이 차이를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시편 117편에는 시편 2편이 '여호와가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 왕이며 하나님이라고 했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그의 힘과 크기와 지식과 거룩함에 관계없이 멸망당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시편 2:12도 '자 보라 네가 아들을 경배하지 아니하면 인정사정 가릴 것 없이 오직 멸망뿐이다. 너의 길과 네 자신이 네 생명과 행위, ㅈ어부, 법, 예배 등과 함께 멸망하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곧 시편 2:9을 그 외적 표현대로 경배하지 않는 자를 부수신다는 문자적 의미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초기에 쓰인 시편 2편 주석은 이 구절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곧 9절의 '철장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이를 철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법이 영에 관해서는 매우 온화한 반면에 육에 관해서는 아주 엄하다는 뜻이며 철이 모든 물건을 부수듯이 그리스도의 말씀도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는 것이다. 또한 질그릇도 모든 그리스도인이라 말한다. 이는 '질그릇이 깨지기 쉽듯이 굳어진 불신앙에 의해서 완고해지지 않은 온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복종하며 그 말씀에 반대하거나 저항하지 않으며, 또한 깨어진 그릇은 이전 기능에 견주어 전혀 쓸모가 없다'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는 영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12절 역시 큰 경외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예배하라는 것으로, 곧 순결한 예배는 그리스도에게 입 맞추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고 그의 손에 입 맞추는 것이라는 권고로 해석하고 있다. 위의 설명 특히 시편 2편의 해석에 대한 초기와 후기의 해석의 변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전통적인 해석인 영적(알레고리적) 해석에서 벗어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성서해석 방법은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변화라 볼 수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제롬의 경우처럼, 루터의 원문에 대한 연구 때문이라 여겨진다. 성서 원문에 관심을 기울인 루터는 점차 원문에 의한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단지 역사적 의미의 해석에 그치지 않고 르페블에 의해 강조된 성서를 읽는 각 개인에게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즉 문법적인 방법에 의한 뜻과 현세대에 주어진 메시지와의 상호관련성을 발견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노력은 성서의 해석 방법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오늘날의 성서해석학의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사실은 루터에게 있어서도 알레고리적 해석은 성서 특히 구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구였다는 점이다.

 

 


 

 3. 결  론

 지금까지 우리는 초기 교회의 성서해석 방법부터 중세까지의 성서해석 방법을 알레고리적 해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초기 교회로부터 중세의 교회의 성서해석에 있어서 알레고리적 성서해석 방법이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알레고리적 성서해석법이 이를 사용한 교부들에 의해서도 도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자 특히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부들, 그리고 중세 대부분의 교회는 알레고리적 성서해석 방법을 인정하고 이를 널리 사용하였다. 비록 아퀴나스와 루터의 영향으로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른 것으로 인정되었지만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본문의 더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시도는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의 후계자들은 개혁자들의 건전한 성경 해석 원리를 잘 이어받아 발전시키지 못했고, 알레고리 해석은 여전히 교회 안에서 지배적인 해석 원리로 간주되는 실정이다.

 

 초기로부터 교회는 어떻게 말씀을 현실에 적용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하여 왔다. 또한 이단들의 다양한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교회의 전승을 지킬 것인가 하는 것 역시 긴급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구약이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가 하는 점도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교회가 신구약의 통일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나 고정되기 시작한 경전을 현실의 문제에 적용하기 위해서 재해석의 수단으로 새로운 해석법이 필요했는데 알레고리적 해석은 좋은 답이 되었다. 비록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이 본문이 보여주고자 하는 원래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해석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와는 다른 메시지를 찾을 가능성이 크다는 약점이 있으나 역사적, 문자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고 원래적 의미를 찾는 데만 관심을 집중하여 신학적, 교리적인 면에 관심이 결여되어 교회에 들려줄 메시지를 찾지 못하고 학문적인 연구로 그칠 가능성이 있는 문자적 해석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수용해야 한다.

 

 

 

 

 참 고 문 헌

 

 <외 국 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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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 역 서>

 R. M. Grant,「성서해석의 역사」, 이상훈 옮김(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5)

W. W. Klein, C. L. Blomberg, R. L. Hubbard, Jr.,「성경해석학 총론」, 류호영 옮김(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7)

 


 

 <국 내 도 서>

 강성열, 오덕호, 정기철,「설교자를 위한 성서해석학 입문」(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이승진,「설교를 위한 성경해석」(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08)

 


 

 <학술 및 사전류>

 최홍진,「알레고리적 성서해석 방법의 가능성」신학이해 1999, 제17권

지원용 편저,[루터선집]2권(서울: 컨콜디아사, 1983)

정창균, "설교학 사전"[알레고리 해석](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4)

 


 

 <논   문>

 오우성, 이레니우스, “터툴리안과 오리겐의 성경관과 성경 주석에 관한 연구”, [계명신학], 제5집

(대구 : 계명대학교, 1990)

박형용, “성경해석의 역사적 교훈”,[신학정론],(수원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출판부, 1985. 11)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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