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고 계신 주님
눅24:28-35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다.]
• 희망은 늘 작은 데서 시작된다
부활절 아침,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하고 인사를 건네고 계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캄캄했던 죽음의 밤이 지나고 생명의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부활과 더불어 열린 새 아침은 창조의 첫날을 밝히던 그 빛으로 충만합니다. 세상의 어떤 어둠도 삼킬 수 없는 빛 말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지만, 부활의 빛이 그들 속에 깊이 스며들 때 그들은 어둠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부활의 새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맑게 부활의 기쁨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울고 있는 이들의 참담한 울음소리가 우리 귀에 쟁쟁히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오늘은 기쁨의 날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진 날이었습니다. 참사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죽어간 이들의 억울한 신음소리는 아직 신원되지 않았습니다. 세월호는 1091일만에 뭍으로 올라왔고, 이제 선체 수색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긁히고 찢기며 뚫리고 녹슬어서 성한 곳 하나 없는 무참한 그 배를 보며 충북대 문광훈 교수는 '우리의 집단적 자화상'이라고 말했습니다(문광훈의 에세이 '자기 계몽의 자발적 확대' 중에서). 어떤 의미에서 그런 것일까요? 세월호는 압축적 경제 성장을 구가해온 우리가 소홀히 한 것들의 총합입니다. 체계적 관리 부실, 책임 회피, 규정 위반, 이윤 추구, 부패와 미숙, 국가의 부재……. 한 마디로 세월호는 반생명적인 문화의 종국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으로 우리 가운데 가로누워 있습니다. 그 속에서 죽어간 이들을 모른 체하며 부활을 기념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은 생명을 죽이고, 파괴하고, 유린하는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 혹은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가득 찬 세상과 권력자들이 폭력적으로 제거해버린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세상 도처에서 억울하게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나요? 우울한 생각이 들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며 애태우던 이사야의 비전을 되뇌이곤 합니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 땅 한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제단 하나가 세워지겠고, 이집트 국경지대에는 주님께 바치는 돌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다"(사19:19). 제단 하나, 돌기둥 하나는 비록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새 날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징표가 되는 법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씨앗처럼 희망은 그렇게 절망의 땅에서 돋아납니다. 죽음의 땅에 생명의 나무 하나 우뚝 서 있을 때, 그 땅을 걷고 있는 이들은 새로운 꿈을 가슴에 품게 됩니다. 주님은 그런 존재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 절망의 내리막길에서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두 길손이 예루살렘에서 삼십 리 쯤 떨어진 엠마오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글로바인데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다"(요19:25)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동행인이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였을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그들은 먼 길을 걸으며 자기들이 그동안 겪은 일들을 하나하나 복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슬며시 그들 곁에 다가가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짐짓 물으셨습니다. 글로바는 자기가 경험했던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분이 얼마나 말씀과 행동에 힘이 있었는지, 그분과 더불어 도래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갈릴리 민중들 사이에서 얼마나 확산되었는지. 하지만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그 모든 희망들이 물거품처럼 꺼져버렸는데,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 가운데는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퍼뜨리는 이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한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설명해주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겪고서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두웠던 두 제자의 마음에 서광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들은 예수를 자기집으로 초대합니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님은 그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함께 음식을 드실 때 빵을 들어 축복 기도를 드리고는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신 것입니다. 그제서야 두 제자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는 그들 앞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놀라운 일을 경험한 두 사람은 길손이 자기들에게 말씀을 풀어 설명해줄 때 자기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음을 상기하고는 곧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이르자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들이 경험한 부활의 주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도 자기들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 이야기의 확장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부활하신 주님은 낙심한 이들을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는 부활의 첫 증인들이 여인들이었다고 말합니다. 누구보다도 깊이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들, 그렇기에 그분의 죽음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들에게 주님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 후에 남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당시의 관습은 여성들이 법정의 증인이 되기에도 부적합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여성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내세우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여러 마리아들에게서 자식들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온 세상의 어머니들의 모습을 봅니다. 불의에 항거하다가 죽어간 자식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어머니들, 자식들을 차마 떠나 보낼 수 없는 세월호 희생자의 어머니들 말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이들 곁에 지금도 다가와 길을 함께 걷고 계십니다.
둘째, 저는 글로바 일행이 낯선 이와 더불어 스스럼없이 예수에게 품었던 자기들의 기대와 좌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걸어가시면서 성경을 바탕으로 하여 진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이야기는 어떤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삽니까? 먹고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 아니면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는 죽음이 일상화된 세상에 살고 있기에 타자들의 고통에 어느 정도 무감각해졌습니다. 돈푼 깨나 있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갑질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잠시 분노하지만 곧 잊어버리고 자신의 일상에 몰두하곤 합니다. 힘 있는 이들이 약한 이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주고, 그들의 존엄성을 박탈하는 세상에서 진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만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의 꿈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셋째, 낯선 이를 자기 삶의 공간 속에 맞아들이고, 음식을 함께 나눌 때 새로운 세상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모두 잠재적 적으로 여겨야 한다는 소리를 거듭 듣고 있습니다. 낯선 이들이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를 지배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낯선 이들이야말로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주는 이들임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며 살았던 사람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아픈 사연을 듣고, 그의 이웃이 되어 주려 할 때 우리 눈은 열리는 법입니다. 설 땅을 잃어버린 이들일수록 세상에 대한 적대감을 크게 품습니다. 환대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도전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낯선 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넷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은 함께 모여 자기들의 경험을 나눠야 합니다. 경험을 나눌 때 우리는 진리 안에 속해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떼제 공동체에서 만난 성공회 사제는 제게 거듭거듭 예수와 만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경험도 들려주었습니다. 주님은 참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만나십니다. 누구의 경험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자꾸 벗들과 자기의 예수 체험을 나누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 5반 이창현 군의 어머니 최선화 집사가 세월호 추모 음악회에서 올린 기도의 일부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창조주이시며 전능자라고 불리우는 당신께 기도드리는 건 쉽지 않습니다. 3년 전 우리 아이들의 살려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외면했었으니까요. 당신께 등돌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 당신이 계시더군요. 더 이상 울 힘조차 없어 그저 멍하니 앉아 바다만 바라보던 팽목항에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하늘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던 국회에도, 내리쬐는 땡볕을 피할 그늘 하나 찾기 어려웠던 광화문에도, 하수구 냄새에 시달려야 했던 청운동 사무소에도, 침몰 지점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동거차도에도, 그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세월호가 누워있는 목포신항에도 당신은 계셨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분들이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다가와서 안아주시며 같이 울어주시는 따뜻함에서 당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당신께 기도할 때 그 기도 좀 들어주시지 왜 우리 아이들이 없어진 지금 모르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나요?"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합니다. 그게 우리가 드릴 합당한 예배라는 것입니다(롬12:1). 아픔의 자리, 찢김의 자리, 수치와 모욕의 자리에서 울고 있는 이들 곁에 다가설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관에 들어서게 됩니다.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피울음을 삼키고 있는 희생자 유가족들, 세계 도처에서 전쟁과 테러로 희생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우리가 참 사람인지, 참 그리스도의 사람인지를 묻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죽음은 생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증오는 사랑을 무력화시킬 수 없습니다. 어둠은 빛을 삼킬 수 없습니다. 거짓은 진실을 가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바로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품고 걷는 인생길 위에서 문득 우리의 동행이 되어주시는 주님과 함께 참 사람의 길로 올곧게 걸어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팔을 불지말아라 (0) | 2017.07.31 |
---|---|
사랑과 분별력 (0) | 2017.07.05 |
흔들리지 마십시오 (0) | 2017.06.03 |
주님이 놓으신 기초 (0) | 2017.06.03 |
어려운 시절 (0) | 2017.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