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나팔을 불지말아라

천국생활 2017. 7. 31. 10:20

나팔을 불지 말아라
마6:1-4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그렇게 하듯이,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무덥다고는 하지만 벌써 절기는 대서를 지나 입추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올 여름에는 낯선 광경 하나가 도시 풍경에 끼어들었습니다. 손에 들고 다니는 선풍기 말입니다. 남녀 노소할 것 없이 그 선풍기를 들고 다닙니다. 땀이 많이 나는 분들에게는 참 편리한 도구일 것 같습니다. 낭만적이진 않습니다. 저는 편리함보다는 낭만에 끌립니다. 윤석중 선생님의 노랫말에 박태현 선생님이 곡을 붙인 동요 '산바람 강바람'을 잘 아시지요? 무더운 여름날 허위단심으로 산길을 걷다가 문득 서늘한 바람과 만나면 그 노래가 저절로 떠오르곤 했습니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대요". 2절은 우리를 더욱 아련한 정경 속으로 이끌어 갑니다. "강가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사공이 배를 젓다 잠이 들어도/저 혼자 나룻배를 저어간대요". 나무꾼도, 사공도 아니지만 저는 문득 만나는 그런 바람이 참 좋습니다. 선풍기 들고 다닌다고 시비하려는 것은 아니니 절대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사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다른 데 있습니다. 거리를 걷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가끔 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다들 힘겹게 살고 있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마음에 상처 없는 사람이 없고, 근심 걱정 없는 사람 없습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딘가에 기댄 채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싶어합니다. 무더운 여름날 나그네를 품어주는 느티나무 그늘처럼 품이 넓은 사람이 그리운 건 그 때문입니다. 문득 불어와 무더위에 지친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시원한 바람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저 그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이에게 용기를 주고 위안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존재가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힘입니다.

세상이 너무 거칠어졌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 포악해졌습니다. 마음이 고요할 날이 없습니다. 북한은 ICBM 급 미사일을 쏘아 올려 한반도를 긴장 가운데 몰아넣고 있습니다. 며칠 전 한 40대 남성은 길에서 택시를 잡고 있는 자기에게 경적을 울렸다 하여 버스 기사를 흉기로 찔렀습니다. 전자 팔찌를 찬 채 여성을 성폭행하려던 이가 붙잡혔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참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동안 '사막에서 살아남기', '빙하에서 살아남기', '화산에서 살아남기' 등의 책이 유행했습니다. 이제는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살아남기'라는 책이 나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센 척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막말이 도를 넘고 있습니다. 딴죽 걸기, 비아냥거리기, 조롱하기, 무시하기가 생존의 전략인양 횡행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이들의 언어는 단정적이고, 도발적이고, 당파적입니다. 그래야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행태의 밑바닥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인정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약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글에 반응이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자기 존재를 부정당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 자극적인 언어나 논리를 사용합니다. 악순환입니다. 이런 이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는 세상이 후텁지근해졌습니다. 시원한 그늘, 선선한 바람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을까요?

• 왜 우리는 위선적으로 살까?
오늘 본문을 통해 그 길을 모색해보려고 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이 경건생활의 핵심이라 생각했던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 가지 경건행위에서 예수님이 공히 경계하신 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은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겉으로만 하는 착한 일을 뜻합니다. 거짓 혹은 속이다라는 뜻의 '위僞'자는 '사람 人'변에 '할 爲' 자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 곧 거짓이요, 위선이라는 말일 겁니다. 주님은 그렇기에 제자들에게 자선을 베풀든,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사람들 앞에서' 혹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먼저는 일종의 자기 위안입니다. 늘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살지만, 가끔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자기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구걸하는 이에게 돈 몇 푼 쥐어주거나 수레를 조금 밀어주고는 스스로 기꺼워하기도 합니다. 남들에게 자기를 멋지게 포장하기 위해 자선을 베푸는 이들도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에 바탕을 두지 않는 선행은 자기를 치장하기 위한 장신구에 불과합니다.

진실이 아닌 위선이 삶을 이끌 때 우리 영혼은 더욱 황폐하게 변합니다. 제대로 주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지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준다는 의식조차 없는 게 좋습니다. 주는 행위가 시혜를 베푸는 행동이 될 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는 비대칭적 권력관계가 발생합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선물로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당신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선물이었다는 말입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은 주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면서도 싫은 생각이 없고, 즐거움을 위하는 맘도 없고, 덕으로 여기는 생각조차 없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줌은 마치 저 건너 골짜기의 상록수가 공중을 향해 그 향을 뿜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손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들의 눈 뒤에서 하나님은 땅을 향해 빙긋이 웃으신다.
청함을 받고 주는 것이 좋으나, 청함을 받기 전에 알아차리고 줌은 더 좋다."
(함석헌 전집 16, <사람의 아들 예수/예언자>, 한길사, 1987년 2월 10일, p.235)

• 잘 주고, 잘 받기
주는 이들도 잘 주어야 하지만, 받는 이들도 잘 받아야 합니다. 받는 이들도 괜히 주눅이 들거나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게으름이나 무절제한 삶으로 인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사정이 조금 다르긴 합니다. 아무리 애써도 곤경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들은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칼릴 지브란은 받는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 받는 자들아, 인생은 다 받는 자다. 신세진다는 생각을 말라, 그러면 너희와 너희에게 주는 자 위에다 멍에를 메움이 된다.
차라리 주는 자와 한 가지 그 선물을 날개처럼 타고 위에 오르라.
지나치게 빚진 생각을 함은 아낄 줄 모르는 땅을 그 어머니로 삼고 하나님을 그 아버지로 삼는 그의 넓은 가슴을 도리어 의심하는 일이 되느니라."
(앞의 책, p.236)

세상이 불공평한지라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기 어려운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러한 불공평을 가급적 해소하여 모두가 자기 존엄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일 겁니다. 몇 년 전부터 젊은이들 사이에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포되고 있습니다. 지옥을 뜻하는 '헬'과 전근대의 표상인 '조선'이 결합되어 묘한 느낌을 줍니다.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한이 그 용어 속에 담겨 있습니다. 알바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빈곤 노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빈곤을 영속화하는 세상을 바로잡는 것은 국가와 모든 시민들의 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토라의 핵심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던 나그네였다.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출22:21-23)

하나님은 세상의 못난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당신의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추수할 때는 밭의 한 모퉁이는 남겨두라 이르셨습니다. 그 마을에 함께 살고 있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땅의 주인이신 주님의 당연한 요구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돈을 꾸어주었다고 해서 빚쟁이처럼 독촉해서도 안 되고, 겉옷을 담보로 잡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안식년이 되면 땅을 놀리고 묵혀서, 거기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나 가난한 사람들과 들짐승이 먹게 해야 했습니다. 희년이 되면 가난에 몰려 남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가야 했고, 종으로 팔렸던 사람도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바로 이런 세상의 꿈이 당신을 통해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의 주민으로 확고히 편입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능력을 점차 잃어갑니다. 우리가 속한 세상은 새로운 상품에 대한 매혹과 남보다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우리가 소비사회의 신민이 되도록 강제합니다. 돈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안겨주지만 깊은 행복감을 주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다른 이들과의 깊은 결속과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셨습니다. 돈이 주는 매혹이 사람들을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그 돈을 잘 쓰면 우정의 세상을 열어갈 수도 있다는 뜻일 겁니다.

• 아름다운 삶의 실험
가까운 후암동 쪽방촌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위기 가정을 돕는 사역을 하는 김용삼 목사님은 '희망 나눔 우체통'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의 교회 앞에는 빨간색 우체통이 하나 놓여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메시지가 적혀 있습니다. "아래의 경우 희망 나눔 우체통에 필요사항과 주소를 적어 넣어 주세요. (절대 비밀로 합니다) 1. 쌀이 떨어진 가정, 비밀리에 적힌 주소로 쌀을 보내드립니다. 2. 실직 등으로 거리로 내몰릴 위기 가정, 구청에 알림/구청의 확인 절차 후 월세 등 긴급지원 3. 힘겨운 이웃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줄 분도 편지를 넣어 주세요." 희망 우체통은 위기 가정을 발굴하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부산에서 독거노인들의 주검이 연달아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희망 나눔 우체통은 그런 위기 속에 몰린 이들에게 던져진 밧줄입니다. 우리교회 사회봉사부가 이런 일을 시도해보면 좋겠습니다.

전북 완주군 이서면에는 '행복 채움 나눔 냉장고'가 있다고 합니다.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와서 마음껏 음식을 가져갈 수 있는 냉장고입니다. 관에서 시작한 일인 것 같은데, 그것이 이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음식을 가져다가 먹는 이들은 참 고맙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음식을 채워 넣는 이들은 '살아보라, 버텨보라'는 격려 문구를 남기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발생시키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등한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런 소박한 실천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면서,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대조차 내려놓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작은 선행을 하고는 남에게 알리고 싶어 나팔을 부는 일을 그만 둘 때 우리 영혼의 근육이 조금씩 자라납니다. 위악적인 사람들과 위선적인 사람들은 모두 딱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진실한 사람의 길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으로,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모든 때에 선을 행하라고 권했습니다. 이런 부름에 응답하는 기쁨을 한껏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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