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위대한 약속

천국생활 2014. 3. 17. 13:58

위대한 약속
벧후1:3-11

 

 


• 안내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얼마나 발전하셨습니까? 얼마나 더 깊어지셨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한 느낌이 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저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더 발전하라고, 더 깊어지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우리는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에 적응하며 사느라 우리는 길을 가는 존재임을 잊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는 <여인숙>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시인은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고, 그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고, 그들을 집안으로 초대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까닭이 무엇일까요? 모든 손님은 우리를 인도하라며 위에서 보낸 안내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내자가 쓴 맛을 안겨줄 수도 있고, 단 맛을 안겨 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일 때 비애는 줄고, 지혜는 깊어질 겁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3)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미래 시제가 아니라 완료 시제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까닭을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선물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누리고, 하나님께 속한 탁월함을 체현하며 사는 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선물인 동시에 과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신 후에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마6:25, 33)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는 구해야 할 것의 우선순위를 뒤바꾼 채 살아갑니다.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모든 무거움은 이러한 뒤바뀜에서 초래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신앙 훈련
하나님의 영광과 덕을 누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약속입니다. 그 약속 속에 내포된 뜻은 우리가 더 이상 정욕에 이끌리다가 부패해버리는 사람 곧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품성에 참여한다는 말을 우리가 신적 존재로 변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된 존재로 산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이런 위대한 약속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필요한 것은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한 치열한 노력입니다. 5절과 10절에 나오는 '열성을 더하여', '더욱 더 힘써서'라는 구절이 가리키는 바도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개신교에 가장 부족한 것이 '수행' 혹은 '훈련'(discipline)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치열한 자기 닦음의 과정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말이 곡해되어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행위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을 마치 인간의 공로에 대한 보상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은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위대한 약속을 이루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생활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것을 삶 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 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롬2:28-29)라고 말했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의 삶, 묵상의 삶, 감사의 삶, 실천의 삶, 헌신의 삶, 단순한 삶을 자꾸만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이 없는 신앙생활이 오늘의 무력한 신앙인들을 낳고 있습니다. 초보단계의 훈련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그 후에는 꾸준한 자기 닦음이 필요합니다. 본문의 5절부터 7절은 믿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덕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목록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납니다. 성서 기자는 당시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덕의 목록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앞뒤에서 기독교적 가치로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 신앙적 지향
진실하게 믿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것은 덕입니다. 국어사전은 덕을 '고매하고 너그러운 도덕적 품성', '윤리적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인격적 능력'이라 풀이하고 있습니다. 사실 덕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아레테arete'는 일반적으로 '탁월함'을 의미합니다. 목수의 아레테는 좋은 솜씨이고, 육상 선수의 아레테는 빠른 발이고, 토지의 아레테는 비옥함입니다. 믿는 이들의 아레테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낮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5:2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은 도덕적인 삶에 있어서도 탁월함을 보여야 합니다.

덕에 더할 것은 지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습득된 정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실천적 지혜 혹은 분별력을 뜻합니다. 성경은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 가르칩니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자기의 앎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재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자기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열심은 있는 데 분별력이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거짓 교사들의 꾐에 빠집니다.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닌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지식에 더할 것은 절제입니다. 절제란 자기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절제에 대칭되는 말은 '과도함' 혹은 '넘침'입니다. 옛말에도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過猶不及)는 말이 있습니다. 절제할 수 있어야 삶이 담백해집니다. 자본주의 세상은 욕망을 확대재생산함으로써 유지됩니다. 그런데 욕망의 길에 접어든 이들은 깊은 만족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전도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 옛 사람은 '족한 줄 알면 욕됨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 老子44章)고 말했습니다. 절제하는 사람이라야 자기 생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내적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절제에 더할 것은 인내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 인내는 두 가지 차원을 갖습니다. 첫째는 악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적당히’, ‘융통성 있게’ 살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의 사고는 유연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유연함이 불의를 용인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일단 그 길로 접어드는 순간 우리 속에 깃든 신성한 불꽃은 꺼지고 맙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 같더라도,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하는 믿음으로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했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상 앞에 절할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인내에 더할 것은 경건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과 '삼가며 조심하는 마음'이 더해진 것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사상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敬'이 됩니다. '경'이란 '하나'를 정했으면 그 후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主一無適). 우리에게 그 하나는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경건입니다. 경건은 우리 내면에 박힌 든든한 기둥입니다. 그 기둥이 있어야 허둥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경건한 이들은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경건에 더할 것은 우애입니다. 우애는 이웃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친절히 대하고, 그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에 참여했던 이들은 마음의 장벽이 무너지고,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감격적으로 체험했을 겁니다. 천박하고 거친 말, 냉소적이고 조롱 섞인 말이 넘치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이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앙공동체는 우애가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애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더해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우리는 신적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지레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닮으려고 애쓸 때 우리는 조금 나은 존재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이 모든 덕의 완성입니다.

• 넘어지지 않으려면
이런 것들이 갖추어지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서 기자는 이런 것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근시안이거나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런 것 아닐까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영원의 빛에 비추어 우리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포말처럼 스러져버릴 것들에 온통 사로잡힌 채 자기가 영적인 존재임을 잊어버린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에서 더 좋은 것은 버리고, 덜 좋은 것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10)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부르심과 택하심은 '소명'을 달리 일컬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함께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우리 삶 속에 '하나님 나라'를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을 아주 간명하게 요약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저는 봄이 되면 늘 북한산 문수봉 근처에 있는 커다란 쥐똥나무를 생각합니다. 어느 해 봄날 문수봉에서 문수사 쪽으로 내려가는 데 어디선가 붕붕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습니다.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그 소리가 흰 꽃을 가득 이고 있는 커다란 쥐똥나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나무에서 꿀을 채취하느라 수천 마리의 벌들이 붕붕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놀라운 생명의 일렁임이 제 가슴까지 일렁이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흥에 겨워 살아있음을 함께 경축하는 세상, 주님은 그런 세상의 꿈에 사로잡힌 채 사셨던 것입니다.

교사로부터 체벌을 당한 아이가 죽고, 가난에 내몰린 이들이 저 그늘진 곳에서 속절없이 죽어가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어서 눈물짓고 있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생명의 잔치에 초대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 혼자 행복하려는 마음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더불어 행복하기를 꿈꾸고, '너'를 위해 좋은 몫을 남겨두고, 고통 받는 이웃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는 일로부터 천국은 시작됩니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우리도 흔들리지 않는 나라의 상속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라도 기독교인다운 품성을 내면화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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