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겨자씨 믿음

천국생활 2014. 3. 12. 15:25

산보다도 더 무거운 것
마17:14-20


[그들이 무리에게 오니,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주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간질병으로 몹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빠지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아이는 그 순간에 나았다. 그 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께 다가가서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 산문적인 현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제자 셋과 함께 산에 오르셨던 주님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었기에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산에서 자기를 잊을 정도의 황홀한 체험을 했던 제자들, 특히 그곳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다고 간청했던 베드로는 아쉬웠을 것입니다. 산 아래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간질병에 시달리는 아들을 둔 한 아버지였습니다. 산 위의 세계와 산 아래 세계는 이처럼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어쩌면 이게 우리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하늘과 접속된 듯이 황홀한 시적 순간은 잠시뿐이고, 지속되는 것은 산문적인 현실입니다. 신경림 선생은 <장자莊子를 빌려>라는 시에서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떨어져나갈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합니다. 현실은 조금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사뭇 다른 모습으로 변하곤 합니다. 성찰의 거리가 확보되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시인이 산을 내려와 속초에 들어서는 순간 현실은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다 속초로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중앙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다음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가까이서 바라보면 저 높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살이가 빚어내는 삶의 무늬가 이처럼 다채롭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喜怒哀樂愛惡欲의 온갖 감정들이 엮어내는 직물과 같습니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큰 지혜는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조화를 이루는 데서 나옵니다.



• 제자들의 무능
다른 복음서들도 고통 받는 아이의 아버지와 예수님의 대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아이가 귀신pneuma에 들렸다고 일관성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막9:17, 눅9:39). 그런데 마태복음만 유독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간질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셀레니아조마이seleniazomai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그 단어를 직역하면 '달의 기운에 사로잡혔다'는 뜻이 됩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마태복음 4:25과 이곳에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태가 이런 단어를 굳이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학자들은 마태복음서가 시리아 지역에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리아 지역은 달신 숭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달의 기운에 사로잡혀 있던 그 아이의 상황을 달의 기운데 사로잡힌 것으로 표현한 것은 어쩌면 그릇된 종교에 사로잡혀 있던 그 지역 사람들의 처지를 가리키려는 마태의 의도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그 아이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힘은 부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아이는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물 속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어떤 큰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는 있지만 그 아이가 그 지경이 된 까닭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지역에서 벌어진 로마인들의 잔학행위를 목격했기 때문일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개연성 있는 설명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때 사람들은 흔히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아이가 달의 불길한 기운에 사로잡혔다고 말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든 아이가 그 지경이 된 후 가족들의 삶은 황폐하게 변했을 겁니다. 어느 날 예수가 자기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불행한 아버지는 예수를 만나러 한 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예수가 병을 고치는 자요, 귀신 축출자라는 소문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고, 급한 마음에 그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아이의 치유를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깊은 당혹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등장하신 겁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예수님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17)

제자들의 무능함이 예수님의 시름을 깊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할 때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긴다고 아룁니다. 믿음이 좋은 이의 말 같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속상하게 해드리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겸손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언제나 의존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선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주님의 답답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다음 장면에서 마태는 예수님이 귀신을 꾸짖어 내쫓았다고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꾸짖는다는 말은 예수께서 귀신보다 더 큰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사회적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악한 영들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꾸짖어 내쫓지 못합니다. 기독교의 위기는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권위의 상실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을 꾸짖기는커녕 믿지 않는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는 주님의 탄식이 천둥소리처럼 들려옵니다.



• 겨자씨 믿음
나중에 제자들은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다'는 말은 사실은 '불신앙'(apistian)을 뜻합니다.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믿음만 있으면 북한산을 우리 집 뒤로 옮길 수도 있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그저 해보신 말씀입니까? 저는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사실은 나를 움직이는 믿음이다. 산보다도 더 무거운 것은 내 몸이다. 산을 참말 움직일 수 있어도 내가 나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가 믿기만 하면 산이라도 옮겨갈 것이다 하고 내 믿음을 믿으면 산보다도 더 무겁고 험하던 내 몸이 언젠지 모르게 움직여진단 말이다. 움직여진 줄도 모르게 움직여진다. 그러므로 산이 움직여진 것으로 보인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잘 부리는 사람은 하루 동안에 열 스물의 산봉우리를 내 발 밑으로 지나가게 할 수 있으나 내 몸을 잘 부리지 못하는 사람은 머리 앞의 책도 일 년을 가도 못 읽고 만다. 그러나 산을 옮기자 해서 산더러 여기서 일어나 저 바다 속으로 가거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내가 나더라 옮겨가라고 명령을 해야 옳은 일이다. 어디로 옮겨가란 말인가? 하나님께로다."(<너 자신을 혁명하라> 중에서)

우리 앞에는 움직여야 할 산들이 참 많습니다. 그 산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우리의 꿈을 비웃는 듯 압도적으로 보입니다. 지금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꿈을 잃어버린 채 세상을 떠도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산과 같은 그런 문제들을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꾸만 우리 마음을 들어 올려야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산이 아니라 나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실패에 따른 두려움이 없습니다. 할 수 있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기에 합니다. 무기력에서 깨어나십시오.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할 수 없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의 시선이 고통 속에 있는 동료들을 향할 수 있기를 빕니다.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들을 꾸짖을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우리 속에 차오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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