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합1:1-4
[이것은 예언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말씀이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 오늘, 우리의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앞둔 이번 주일은 주님의 산상변화주일입니다. 수난의 길을 떠나시기 전, 주님은 세 명의 제자와 함께 산에 올라가 빛 가운데 머무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이후에 제자들이 맞이하게 될 긴 영혼의 밤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95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봄의 길목에서 맞는 3.1절은, 겨울 추위 속에서도 역사의 봄을 꿈꾸는 우리 민족의 검질긴 생명력을 상기시켜주는 자랑스러운 날입니다.
일제시대에 <성서조선>을 발간하면서 가물가물 잠 속에 빠져들던 이 땅 사람들을 깨웠던 김교신 선생님의 '조와弔蛙'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입니다. 선생은 늘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 가느다란 폭포 아래에 형성된 작은 담潭(물웅덩이) 옆에 있는 평평한 바위를 기도처로 삼고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를 올리다보면 개구리 몇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오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늦가을이 되어 엷은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개구리의 기동이 완만해지고, 마침내 두꺼운 얼음이 얼면 기도 소리, 찬송 소리가 들려도 개구리는 기척조차 없었습니다. 이듬해 봄, 봄비가 쏟아지던 새벽에 선생은 개구리의 안부가 궁금하여 허리를 굽혀 담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개구리 사체 몇 개가 보였습니다.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에 담의 밑바닥까지 얼어붙어 개구리까지 얼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선생은 개구리 사체를 수습하여 땅에 묻어주고 혹시 살아남은 게 없나 싶어 자세히 담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개구리 몇 마리가 살아 있었습니다. 선생은 가볍지 않은 영탄으로 이야기를 마칩니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 글이 <성서조선>에 실린 것은 1942년 3월호였고, 이 책을 마지막으로 성서조건은 폐간되고 맙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기어코 살아남아 봄을 맞이하는 개구리가 가리키는 바를 일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세계의 초일류 국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제국주의의 망령을 온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일본의 우경화는 심각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일본 극우단체들은 혐한류嫌韓流를 의도적으로 조성하고 있고, 총리는 전쟁범죄자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고위 관료들은 위안부는 없었고 다만 자발적으로 군대를 따라다닌 여성들만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동아시아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명백히 밝혀진 남경대학살도 없었다고 부인하여 중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습니다.
몇 해 전 베를린 집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가한 낮 시간에 베를린 시내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다가 어느 관청 건물의 게시판에 붙어 있던 한 장의 흑백 사진 앞에 오래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사진은 어떤 구조물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사람과 그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는 냉전 시대 서독의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였습니다. 그는 공산주의 국가들과 적극적인 대화를 모색하는 등 동방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에 폴란드를 방문했습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와 독일은 오랫동안 앙숙이었습니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바르샤바 전쟁 희생자 위령탑을 방문했습니다. 그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산조차 물리치고 내리는 비를 다 맞았습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문득 비에 젖은 위령탑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담은 사진이 세계 각지에 전송되었습니다. 그 한 장의 사진은 수많은 사람들의 응어리진 가슴을 쓸어내려주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진심으로 참회하는 그의 몸짓 하나가 양국간의 오랜 반목을 그치게 만드는 단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독일은 제3제국 시절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홀로코스트 추모관>을 베를린의 요지에 조성해놓았습니다. 베를린에 가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 한 주간 이상을 중국발 미세 먼지가 한반도를 뒤덮었습니다. 목은 칼칼하고, 시계視界는 흐릿하고, 마음은 울적했습니다. 마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동아시아의 상황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주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의 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제국과 제국이 충돌하는 전쟁의 세기에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 확산되면서 세상에 평화가 정착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사19:23)
• 불의한 세상
하박국 역시 평화를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를 특정하여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박국서는 단일한 저자가 쓴 책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발전 과정을 거친 책으로 보는 게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예언의 앞부분은 주전 600년 무렵을 반영하고 있고, 뒷부분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언제이든 하박국이 맞닥뜨리고 있던 상황은 전형적입니다. "이것은 예언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말씀이다"(1)라는 서언이 나온 이후 다짜고짜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2)
하박국은 지금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듣지 않으시고'라는 구절과 '구해 주지 않으시니'라는 구절이 예언자의 절박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살려 달라는 부르짖음이 넘치는 세상, 더 나아가 '폭력이다' 하고 외칠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폭력'은 '하마스'의 번역어인데, 그것은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현실을 요약하는 말입니다. 기득권자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고 확대하는 일에만 열심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약탈과 폭력, 다툼과 시비가 그칠 새 없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들을 구원하신 후 사회적 약자들을 세심하게 돌보는 나라의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병약하다고 하여 버림받지 않고, 가진 것이 없다 하여 천대받거나 모욕당하지 않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 하여 착취당하지 않는 사회 말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라는 말이나, 추수할 때 밭의 한 모퉁이는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라는 말씀은 그러한 세상을 열기 위한 최소의 장치였습니다.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는 것은 가진 자들의 자선행위가 아니라 의무였습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 규정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약탈과 폭력, 다툼과 시비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박국은 이것을 세 가지 다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해이해졌다'.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한다'.
며칠 전 우리는 송파구 석촌동에서 벌어진 세 모녀의 죽음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들은 집 주인에게 집세와 공과금 등으로 70만원을 남겨두고 함께 목숨을 끊었습니다. 절대적 빈곤층은 아니었다지만 다달이 벌어먹고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였고, 그나마 몸을 다쳐 일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참 슬픕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지만 그들은 그것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기에 발생되는 일입니다. 그들이 남긴 말은 '죄송합니다'였지만, 사실 죄송한 것은 우리입니다. 그들이 남긴 '죄송합니다'라는 말 속에서 저는 하박국의 외침을 듣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그런데 하박국의 이 절박한 부르짖음 속에서 저는 주님의 슬픈 음성을 듣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이미 듣고 있단다. 그리고 그 소리에 응답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건만 너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구나. 나는 너희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은 데, 너희는 내가 그 세상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는구나. 나는 너희가 나의 귀가 되고, 나의 입이 되고, 나의 손과 발이 되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단다.' 제게는 이 소리가 아프게 들려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에 다 응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태만죄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이르렀든지 우리는 그 분량만큼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 더디더라도 기다려라
그러나 정말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비관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사실 그래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비관주의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스가랴에게 주신 비전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슥4:6).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새로운 세상은 옵니다. 예수님은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것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단초를 보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로 굶주린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적다고 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당장 결과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씨를 심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전도서 기자도 같은 말을 합니다.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전11:4)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부지런히 일하여라. 어떤 것이 잘 될지, 이것이 잘 될지 저것이 잘 될지, 아니면 둘 다 잘 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전11:6)
바울 사도도 이러한 사실을 가슴 깊이 명심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고전3:6)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더디더라도 그 때는 반드시 옵니다.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하고 하나님께 대들던 하박국은 마음이 한껏 부푼 자들의 결말을 내다보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2:4)고 말했던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고, 모두가 각자에게 품부된 삶을 한껏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은 아직 요원한 듯 보이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심한 듯 보이는 하나님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하고 불퉁거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언제까지 그럴 거냐?'고 묻고 계십니다. 이제는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희망을 심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제 곧 경칩驚蟄입니다. 농부들은 이미 봄 농사 채비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그러한 우리의 실천 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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