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진실에 복무하라

천국생활 2013. 9. 16. 12:39

진실에 복무하라
잠4:20-27
 

[아이들아,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내가 이르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이 말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너의 마음 속 깊이 간직하여라. 이 말은 그것을 얻는 사람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몸에 건강을 준다.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말을 네 입에서 없애 버리고, 속이는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여라. 눈으로는 앞만 똑바로 보고, 시선은 앞으로만 곧게 두어라. 발로 디딜 곳을 잘 살펴라. 네 모든 길이 안전할 것이다. 좌로든 우로든 빗나가지 말고, 악에서 네 발길을 끊어 버려라.]

• 귀의 종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넘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학교교육진흥주일입니다. 공교육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교육 시장이 비대해진 오늘 기독교교육이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일까요? 저는 아주 단순화시켜서 참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게 ‘참 사람’이냐는 질문에는 다시 답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너무 상투적으로 들려서 아무런 내용을 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늘 삶의 준거점을 자기 욕망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둔다는 말이고, 또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제한하고 또 자기를 바친다는 말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 또한 그렇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도 자기와 무관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특히 고통 받는 이들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고,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돕기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합니다.

기독교교육의 목적은 교회생활에 익숙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도 하나님과 만나지 못한 사람, 복음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나는 오늘 우리가 미래 세대들에게 주어야 할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살아가야 할 초록별 지구를 건강하게 물려주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거기에 한두 가지를 보태본다면,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감수성을 계발해주고, 이웃들의 억눌린 한숨소리를 듣고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들여 세상과 삶을 응시할 줄 아는 느림의 미학을 배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빠름, 빠름’을 외치는 세상, 1초 동안 얼마나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나를 겨루는 세상은 시간의 향기가 사라진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참 삶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여기서 '아이들'이라고 지칭된 사람들은 연소자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이들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의 핵심어가 있다면 ‘들으라’는 말입니다. "잘 들어라", "귀를 기울여라". 사실 성경에는 들으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서 종교를 ‘귀의 종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귀의 종교’라는 말은 ‘눈의 종교’라는 말과 대칭을 이룹니다. 성서 종교가 귀의 종교인 까닭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이 지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눈의 종교입니다. 거대한 신전과 신상의 균형감과 조화 그리고 아름다움은 사람들 속에 경외심과 장엄함을 불러일으킵니다. 문제는 그러한 유형적인 것들이 사람들의 내면에 기존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지속성을 본질로 합니다. 그래서 눈의 종교는 늘 체제 중심적입니다. 변화보다는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귀의 종교는 다릅니다. 귀에 들리는 것은 지속성이 없습니다. 단지 기억에 새겨질 뿐입니다. 성경은 지금 여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언제나 현실 변혁의 길로 우리를 부릅니다. 나는 제1성서의 핵심어는 ‘떠나라’와 ‘돌아오라’는 말이고, 제2성서의 핵심어는 ‘따르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떠나든 따르든 그것은 움직임 곧 변화입니다. 말이 좀 어렵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 삶의 준거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순간마다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측 가능한 ‘상투어’가 아닙니다. 늘 새롭게 들려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길’이라는 은유를 동원해 설명하곤 합니다. 저는 불광동에서 북한산 쪽도리봉 쪽을 향해 걸어 올라갈 때마다 인생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때로는 숲 그늘도 있고 흙길도 있지만, 뙤약볕 아래를 걸어야 할 때도 있고 뜨겁게 달아오른 돌들이 널린 너설을 밟기도 해야 합니다. 짧은 오르막길을 걸으면서도 인생이 떠오르는 것은 그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다는 방증일 겁니다. 인생이란 어쩌면 지루한 일상의 반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실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길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합니다. 저는 인생이란 결국 정답 없는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가 지향을 잃지 않고 살려면 분명한 이정표가 있어야 합니다.

제법 나이가 들고,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춘 이들도 가끔 길을 잃습니다. 그럴 때 떠오르는 것이 부모님입니다. 시인 이정록은 어머니가 툭툭 쏟아내는 말들 속에서 세상 이치를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52세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를 추념하면서 52편의 시를 묶어 <아버지학교>라는 시집을 냈고, 72세에 이르신 어머니를 추억하며 72편의 시를 엮어 <어머니학교>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삶에 대한 통찰력이 넘쳤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지혜의 보고였습니다. 시인은 그런 부모님을 통해 삶의 근본을 통찰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입니다.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겄냐?/내 잘못이라고 혼잣말 되뇌며 살아야 한다./교회나 절간에 골백번 가는 것보다/동네 어르신께 문안 여쭙고 어미 한 번 더 보는 게 나은 거다./저 혼자 웬 산 다 넘으려 나대지 말고 말이여."(<가슴 우물> 중에서)

삶은 이처럼 단순한 건데 우리는 복잡하게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해 줄 말씀과 만나야 합니다.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율법의 아름다움을 각기 8절로 노래한 22개의 노래가 한데 묶여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몇 구절만 뽑아 읽어보겠습니다. 말씀을 삶의 이정표로 삼은 이의 든든함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덧없는 세상살이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동안, 주님의 율례가 나의 노래입니다."(시119:54)
"주님의 법을 내 기쁨으로 삼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시119:92)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시119:105)
"주님의 말씀을 열면, 거기에서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도 깨닫게 합니다."(시119:130)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사람들의 고백이 참 값지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우리 길로 삼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 마음 지키기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나부끼는 부평초처럼 우리 마음은 속절없이 흔들립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감사와 노여움 사이를 오갑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천국을 짓기도 하고 지옥을 짓기도 합니다. 외부 세계의 영향에 민감한 우리 마음은 고요함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일찍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17:9)라고 탄식했습니다.

옛 사람은 어딘가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쓸 수 있어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 金剛經)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똑같은 사안도 이익이나 입장, 친소관계에 따라 전혀 달리 평가합니다. 누가 감히 나는 언제나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은 늘 흔들립니다. 그렇기에 마음을 제대로 쓰고 살려면 늘 잘 조율되어야 합니다. 조율의 핵심은 무엇을 ‘기준음’으로 삼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음으로 삼으라고 권고합니다. 몇 가지 표현이 중첩되어 나타납니다. ‘귀를 기울이라’, ‘한시도 눈을 떼지 말라’, ‘마음 속 깊이 간직하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집중이라는 한자어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일 集에 가운데 中 자가 결합된 말이고, 다른 하나는 잡을/지킬 執에 가운데 中 자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中이라고 한다면 그 뜻에 우리 마음을 오롯이 모아야 하고(集中), 또 그것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執中). 붙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꼭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들 때 우리 속에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생깁니다. 외적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이리저리 까불리지 않는 든든함이 생깁니다. 문제는 우리가 형편에 따라 그 말씀을 외면하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기 삶을 비춰보는 거울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갈1:10) 이 물음 앞에서 달아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간혹 믿는 사람은 입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살면서 우리는 이웃들과 평화스럽게 지내기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심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버리는 순간 삶은 세파에 떠밀리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심을 꼭 지킬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 버릇 들이기
중심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훈련입니다. 본문은 입과 눈과 발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왜곡된 말을 네 입에서 없애 버리고, 속이는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여라."(24) 저는 가끔 말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가끔은 입을 다물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제 영혼의 풍경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매 주일 여러분 앞에 제 영혼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 진실하게 말하려고 애쓰지만, 그 말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때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마12:36-3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렵습니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정신이 흩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정성도 부족해집니다. 말을 적게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중심은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눈으로는 앞만 똑바로 보고, 시선은 앞으로만 곧게 두어라."(25) 이 말을 오해하면 일직선으로 돌진하라는 말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 말은 천박한 호기심에 붙들려 두리번거리지 말라는 뜻도 있겠지만, 지향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지향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발로 디딜 곳을 잘 살펴라. 네 모든 길이 안전할 것이다. 좌로든 우로든 빗나가지 말고, 악에서 네 발길을 끊어 버려라."(26-27) 경거망동하지 말고, 악과의 인연은 단호히 끊고, 신앙적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빗나간다(distracked)는 말은 주의가 산만해져서 넋이 나간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빗나감 없이 공의의 길을 걷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압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적 삶이란 이처럼 눈과 입과 발을 훈련해가는 과정입니다. 자기를 성찰해가면서 지속적으로 훈련하다 보면 그렇게 사는 일이 자연스러워질 때가 옵니다. 토마스 머튼 신부가 틱낫한 스님에게 영성수련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묻자 그는 ‘조용히 문을 여닫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신발을 가지런하게 벗어놓는다든지, 말소리를 낮추어 말한다든지, 화를 내지 않는다든지, 많은 면에서 몸과 마음의 버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개신교 신앙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수행입니다. 자기 닦음 말입니다. 스스로를 깨끗한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품격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은 그가 진리를 체화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는 경외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온통 시장으로 바뀌자 삶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며 삽니다.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사람들은 서로 물고 뜯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라도 화낼 준비가 된 사람들처럼 삽니다. 비난하고 정죄하고 상처를 주고 조롱합니다. 공의를 가장한 비열한 이권다툼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그 틈바구니에 낀 사람들은 사람에 대해 그리고 역사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처럼 인간이 전락한 적이 또 있었을까요?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진실에 복무하겠다는 굳은 결의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이들이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야 할 것은 서로를 따뜻하게 품어 안으려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명 존중과 진실의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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