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하루
창1:1-5
(2012/12/31, 송구영신예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 태초에
밤이 깊습니다. 주님 안에서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모인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회한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그저 주님의 은총만 기다릴 뿐입니다. 늪과 같은 현실을 통과하느라 황폐해진 우리 몸과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입니다. 어제와 오늘 찬송가 274장을 자꾸 불렀습니다. 일부러 찾은 것이 아닌데도 자꾸 부르게 된 것은 성령께서 부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나의 몸과 나의 맘을 깨끗하게 하옵소서/물 가지고 날 씻든지 불 가지고 태우든지/내 안과 밖 다 닦으사 내 모든 죄 멸하소서" 갈팡질팡, 가리사니 없이 살아온 나날이지만 그래도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꿈꾸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의 첫 대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장엄한 말입니다. 이 말과 더불어 우주라는 무대의 막이 열리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태초'는 물론 모든 것에 앞서 있는 절대적인 시작을 이르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와 무관한 아득한 옛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태초'가 있습니다. '나의' 태초도 있고 '여러분의' 태초도 있습니다. 연인들의 사랑이 시작되던 태초도 있습니다. 성경이 태초라는 말로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있음이, 또 너의 있음이, 우리의 관계가 시작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언제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삶이 제 아무리 비루하고 남루해 보여도 우리의 '있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옛 사람들은 기氣가 뭉치면(聚) 사물이 생기고, 기가 흩어지면(散) 사물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는 뜻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존재하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삶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의 삶은 정성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함부로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으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14:31)이라고 말합니다.
• 어둠과 공허와 혼돈 속에서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는 장엄한 선언 이후에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인 빛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만 살펴보겠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조금 다른 광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창조 이전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머리에 잘 그려지지 않는 광경입니다. 가끔 세계의 오지奧地를 찾아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지구상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듯한 풍경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리포터들은 그런 풍경을 두고 마치 태초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혼돈', '공허', '어둠', '깊음'. 이 단어를 나란히 늘어놓고 보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이 단어들은 대개 삶의 곤고함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단어들입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태, 삶의 의미를 다 잃어버린 채 마치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상태, 도무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암담한 현실,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헤어날 길 없는 생의 곤경. 딛고 있던 땅이 뒤흔들리고,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도 갖지 못하는 상태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던 때의 정황이 우리 삶의 풍경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을 받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도 이런 상황에 처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도 주위를 둘러보면 마치 아스라한 벼랑 끝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운 이들이 참 많습니다. 일자리에서 쫓겨난 사람들, 아무런 대책없이 방치된 노인과 환자들, 노숙자들,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입에 풀칠하며 살기도 어려운 이들 말입니다. 공동체의 따뜻함은 사라지고 불신과 냉소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암담함이야말로 혼돈, 공허, 어둠, 깊음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 텍스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할 때 기술된 것입니다. 남의 나라 남의 땅인 그발 강가에 있는 집단 거주지에서 갖은 구박과 천대를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혼돈, 공허, 어둠, 깊음이라는 말로 밖에 요약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 됩니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벌컥 내고, 작은 이익에 연연하고, 남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고 말했던 홉스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어쩔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의 영
누구도 섣부르게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놀라운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이 대목을 "하나님의 영은 물의 심연 위에 새처럼 내려앉으셨다"고 번역했습니다. 다소 과한 번역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이 번역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떠올려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마치 새가 알을 품는 것 같이 혼돈, 공허, 어둠, 깊음 위에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빛이 생겨라"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너무 막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십니까? 이 말을 달리 표현해보겠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깊음 속에 잠겨 원망과 무의미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던 인생들 위에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자 그들로부터 세상의 빛이 터져나왔습니다. 세상을 밝히는 빛은 바로 세상의 천덕꾸러기, 버림받은 사람들, 밑바닥 인생들로부터 움터나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온통 이런 사실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는 분,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 새로운 세상의 모퉁잇돌을 삼으시는 분, 세상의 어리석은 이들을 들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떨기나무처럼 보잘 것 없는 민초들 위에 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불꽃처럼 임하셔서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주님은 지금도 "빛이 생겨라" 명령하고 계십니다. 삶이 제 아무리 고달파도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함석헌 선생님은 모든 사람이 다 대포알이라고 말했습니다. 대포의 보람은 폭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크게 폭발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크게 폭발하심으로 죄악을 부수고, 죄에 짓눌려 있던 이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불발탄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탁 치시면 폭발할 수 있어야 하는 데, 하나님이 치셔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것은 뇌관에 물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도덕성이 해이해지고, 양심이 흐릿해지고, 정의를 추구할 용기가 없습니다. 두려움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탓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 위에 머무시면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일으켜 세우십니다. 저는 이 희망에 올 한 해를 걸고 싶습니다.
힘든 일을 만나도, 낙심되는 상황에 부닥쳐도 '빛이 생겨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만 붙들겠습니다, 바벨론 포로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자 그들의 탄식은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잘 압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겪고 있는 고난이 오히려 세상을 치유하는 창조적 고난이 되기를 꿈꿨습니다. 시편 시인은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시119:71) 하고 노래했습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정진규)는 시가 있습니다만,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는 별빛을 볼 수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어둔 밤을 지날 때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깨어나 빛이 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 하루
빛을 불러내신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신 후, 빛을 낮이라 하고 어둠을 밤이라 하셨습니다. 은혜의 세계는 밤만 있는 세계도 아니고 낮만 있는 세계도 아닙니다. 그 둘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빛은 좋은 것으로 여기고 어둠은 나쁜 것으로 여깁니다. '빛!' 하면 사람들은 기쁨과 희망과 생기 충만한 시간을 떠올리고, '어둠!' 하면 슬픔과 절망과 생의 무거움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아무리 피하려 해도 어둠의 시간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둠조차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캄캄한 절망 속을 걷는다 해도 그 시간조차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은 낮과 밤이 교차하는 리듬 속에서 자랍니다. 낮은 일하고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하는 바로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일입니다. 살림을 하는 주부든,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이든, 누군가를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든, 공부를 하는 학생이든 그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살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밤은 친교와 사색과 휴식의 시간입니다. 밤에는 벗들과 사귀고,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초점을 잃지 않았나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마음을 조율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보급된 후 우리는 밤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삶이 경박해졌습니다. 밤을 밤답게 살아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이 순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이것은 참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루의 시작은 저녁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인간됨은 그가 낮 동안 하는 일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성찰하는 데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저녁을 거쳐 어둠의 시간을 잘 견뎌낼 때 비로소 아침을 맞이하는 법입니다. 시간은 그렇게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하루하루는 아무 의미 없이 주어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하루는 장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잇대어 살아갈 때 우리의 하루는 영원성을 부여받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올 한 해도 여러 가지 어려운 생의 고비를 만날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깊음이 우리 삶을 위협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은 절망과 낙담의 현실을 빛으로 바꿔주십니다. 골짜기 가득 뒹굴고 있던 해골들을 일으켜 하늘 군대로 세우십니다. 두려움에 짓눌려 골방에 머물고 있던 제자들의 마음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그들이 크게 폭발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한 해는 희망에 넘칠 것입니다. 우리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깊음에 가득 찬 이 세상을 뚫고 솟아오르는 한 줄기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 소망으로 한 해를 멋지게 살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면의 빛 (0) | 2013.01.22 |
---|---|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0) | 2013.01.14 |
하나님은 내가 받을 몫의 전부 (0) | 2012.12.31 |
하나님께는 영광 우리에게는 평화 (0) | 2012.12.26 |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0) | 2012.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