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강론

예수탈을 쓴 군주---청파교회 김재흥부목사

천국생활 2011. 6. 20. 17:31

 

요14:15-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ㆍ거룩한 삼위일체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거룩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교우 여러분 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교회는 오래 전부터 성령강림절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주일로 지켜왔습니다.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로운 은혜를 생각하기에 앞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톨릭의 어느 주교가 배를 타고 가다가 한 섬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원주민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들도 크리스찬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기도문조차 알지 못 하고, 여타의 중요한 교리도 모르는 무지한 크리스찬이었습니다.

주교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평소에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곳 원주민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도 셋, 당신도 셋,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주교는 그들의 어수룩한 신앙생활에 놀라면서 그들에게 열심히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주교는 배를 타고 다시 그 섬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곳 원주민 세 사람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배에서 그 섬을 바라보던 주교는 깜짝 놀랍니다.

세 사람의 원주민이 자신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하여 바다 위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교는 경외감에 사로잡혀 그들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오셨습니까? 제게 원하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원주민 세 사람이 대답합니다.

 “예, 죄송한데요 주교님, 저희가 그만 주교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까먹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 까지는 생각나는데

그 다음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주교는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착하신 친구들,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도 셋, 당신도 셋,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바다 위를 걷고 안 걷고를 떠나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도 셋, 당신도 셋,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라고

순박하게 기도할 수 있는 그 원주민들의 마음자리가 부럽게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고백입니다.

 다른 종교와 기독교를 구별해주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삼위일체론은

거룩한 세 분을 다루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거룩하게 느껴집니다.

 15세기 러시아의 이콘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성삼위일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하나님이 한 상에 둘러 앉아 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고요히 바라보는 그림입니다.

 제가 그 그림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세 분의 눈, 눈빛입니다.

세 거룩한 존재가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빛은 화폭을 넘어 저에게 까지 전해지는 듯합니다.

그 수줍은듯 따스한 눈빛은 제 마음속에 고요와 평안과 밝은 기운을 불러일으킵니다.


ㆍ거북한 삼위일체
거룩한 삼위일체는 우리들에게 밝고 따뜻 느낌으로 다가옵니다만 그 교리의 역사는

갈등과 반목, 폭력과 피로 점철된 어둡고 차가운 것이었습니다.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됐습니다.

(공식적으로는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국교가 됨) 비밀리에 모이던 이들은

더 이상 숨어서 예배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로마에 의해 박해받던 교회는 로마의 보호를 받게 됐습니다.

지하에 있던 교회는 시내 한 복판으로 나갔고 비좁던 예배처소는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건물이 됐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와 교회를 통해 제국의 정치적 안정과 통일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안정과 통일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보다는

제국의 분열과 갈등의 이유가 됐습니다.

그 문제의 발단이 된 곳은 아프리카 대륙의 북단에 위치한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인 알렉산더와 장로 아리우스 사이에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큰 논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예수의 신성은 하나님의 신성과 동일하지 않고 유사하다고 했고,

알렉산더 주교와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아타나시우스는 예수의 신성은 하나님의 신성과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단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요 기독교 전체의 문제로 커졌고

기독교는 두 파로 나눠 한 치의 양보 없는 극한 갈등을 일으키게 됐습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325년 자신의 별장이 있는 니케아로 300명이 넘는 교회 주교들을 불러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도록 했습니다.

이 회의가 니케아공의회Councils of Nicaea입니다.

회의에 모인 주교들은, 예수의 신성은 하나님의 신성과 동일하다는 동일 본질론을 정통으로 인정하고

유사 본질론을 주장한 아리우스 파는 출교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와 로마는 평화와 안정을 되찾은 듯 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 사후 그 뒤를 이은 아들들 사이에서 다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했지만 어떤 황제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큰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361년 알렉산드리아에 주교로 있던 게오르기우스가 그의 반대파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게오르기우스는 아리우스파였는데 그 반대파라 할 수 있는 아타나시우스파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낙타 위에 실렸고 그와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의 시신은 밧줄에 묶여 폭도들에 의해 끌려 다녔습니다.

이 후 그들의 시신은 모두 불태워졌습니다. 사건 두 달 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새로운 주교로 부임했습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피 흘림 끝에 삼위일체 교리는 451년 칼케돈 회의에 이르러 오늘의 모습을 띠게 됐습니다.

130여 년간 논쟁에 논쟁을 거듭해 정리된 삼위일체의 교리는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교리였지만

그 과정은 참으로 거북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그때 황실의 힘을 덧입어 교회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 이들은 반대파를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반대파가 맡았던 교구를 빼앗아 자신들이 차지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에게 가져다준 것은 결코 신앙의 자유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는 폭력적인 힘까지 가져다준 것이었습니다.


ㆍ예수의 탈을 쓴 군주
얼마 전 청년사역포럼 이라는 모임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함께 읽고 토론했습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정치가요 외교관이었던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이탈리아 건설을 소망하며 군주론을 썼습니다.

군주론은 근대 정치학의 중요한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많은 정치지도자들에게 필독서가 됐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그려내고 있는 군주의 모습이란 권력 유지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冷血漢)이었습니다.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는 약속과 신의와 인간성마저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자비롭고 정직하며 인간적이며 심지어 경건해 보이는 척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몇 대목만 소개하겠습니다.

무장한 예언자는 모두 성공한 반면,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실패했다. …

사람들이 당신과 당신의 계획을 더 이상 믿지 않을 경우, 힘으로라도 그들이 믿게끔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도 느끼게 하고 동시에 두려움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동시에 둘 다 얻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굳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 덜 주저하기 때문이다.

군주는 자신을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자비롭고 신의가 있으며 정직하고 인간적이며

경건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경건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글들은 제 마음에서 자꾸만 튕겨나갔습니다.

그의 글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그분의 말씀을 생명의 길로 붙들고 살아가려는 사람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글이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제시하고 있는 군주의 길은 예수님의 길과는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의 글을 읽으며 저는 고개를 연신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그려내고 있는 사회의 모습, 지도자의 모습, 인간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모습이요,

교회의 모습이요,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혹시 예수의 탈을 쓴 군주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교회에게 주어졌으며, 중세를 거쳐 더욱 강화된 교회의 정치력, 무력(武力),

폭력성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들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군주성, 폭력성을 씻어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삼위일체 교리사에 드리워진 거북함에서 벗어나 다시,

거룩한 삼위일체의 현존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ㆍ사랑의 삼위일체
저는 신학생 시절에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했던 아타나시우스에 감동했습니다.

수많은 위협을 당하면서도, 수차례 추방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며 거룩한 삼위일체론의 수립을 위해

일생을 불살랐던 아타나시우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삼위일체를 교리로 접해온 저에게 아타나시우스는

그야말로 신앙의 수호자로 비춰졌습니다. 그러다 삶에 대한 경험이 쌓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더 넓어진 이후,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하는 일이 잦아지면서는 예수님의 인성,

인간적인 예수를 강조했던 아리우스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두 사람,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에게 그다지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일생을 헌신해오며 이루어낸 거룩한 교리의 뒷면이 너무 거북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대의명분은 그럴듯하지만 그 명분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너무 예수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유사본질과 동일본질을 두고 싸우는 사이 예수의 본질이며 삼위일체의 본질인 사랑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20,21절)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분이며 동시에 세 분이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설명해내기 참으로 힘든 말이요,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해서 믿을 수 있는 말도 아닙니다.

이는 사랑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와 사랑을 억지로 강요할 수 없는 이유와 같습니다.

이 말은 한 인격을 통해 사랑으로 표현될 때에라야 그 참뜻을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동일본질, 유사본질 운운하며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삶을 통해 하나님과 당신이 한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당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럼 성령님은 누구십니까?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이 걸으셨던 사랑의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서로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따를 때

비로소 예수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됨', 일체의 신비를 만드는 힘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 없이 하나를 느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를 죽일 수도 있다는 마음은 결코 '하나됨', '일체'를 지향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힘없는 이들 위에 군주처럼 군림하려는 자리에서 삼위일체는 그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너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연약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그들을 돕기 위해, 변호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곳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영광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자요, 뛰어난 영성가인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

「성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의 한 은사에 대한 추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선생님의 이름은 만수에토였습니다. 그 선생님은 마을의 학생들 뿐 아니라 주민들을 위해서도

헌신적으로 일하셨던 분입니다. 그는 브라질에서 유럽으로 이주해온 이주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이 먼저 고전어와 법률, 경리, 건축, 전기,

의학 등을 많은 분야를 섭렵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 천대 받던 혼혈아들과 흑인들의 변호인 노릇도 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그를 칭송했다고 합니다. “하늘에는 하나님, 땅에는 만수에토님!”


ㆍ다시, 거룩한 삼위일체
지금, 평화의 섬 제주에는 큰 분쟁이 있습니다.

 강정해안에 기지를 지으려는 해군과 마을을 지키려는 주민들이 4년에 걸쳐 길고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일와 월요일 1박2일 일정으로 강정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월요일에 공사관계자들과 주민들 간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바다 바닥 작업을 위한 대형 크레인을 조립하려는 공사 관계자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주민들,

활동가들 사이의 분쟁이었습니다. 마을 주민 한 분이 보다보다 크레인 밑으로 들어가 누우셨습니다.

두 손으로 크레인을 꼭 붙드셨습니다. 한 바탕 소동 중에 한 공사관계자가 말했습니다.

 “저런 놈들 한둘 죽어도 아무 상관없어. 그냥 밀어붙여.”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끝났습니다만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를 그 강정마을로 부른 사람은 개척자들의 송강호 전도사님이십니다.

전도사님은 네 달여 전부터 강정마을에 내려가 지내시면서 그곳 주민들과 더불어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강정마을과 제주와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전도사님의 마음은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강정마을에 도착한 밤 함께 잠을 자는데 전도사님은 여러 번 큰 소리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 강정마을을 지켜 주십시오. 해군기지가 건설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지켜 주십시오.”

잠꼬대인지 기도인지 분간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때문에 잠은 거의 못 잤지만

전도사님의 진실한 마음만큼은 잘 알 수 있었고 그 마음은 제게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강정 마을에도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가 해군기지 건설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라져 반으로 쪼개진 지 오래됐습니다.

교회에는 찬성파만 남았습니다. 알량한 보상금의 유혹을 뿌리치고 조상들이 450년 간 지켜온 땅을 지키겠다는 사람들은

상처만 받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나라뿐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고아처럼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송강호 전도사님과 몇몇 분들을 중심으로 강정바닷가에는 예배와 기도모임이 시작되었고

그간 상처받고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도사님은 기도와 예배만 드리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강정바다와 주민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강정마을을 지나는 올레7코스의 길을 막기 위해 H빔을 세우고 시멘트를 부을 때 전도사님은 자신의 몸을

시멘트에 던져 몸의 절반이 질퍽한 시멘트에 잠겼고 이에 힘을 얻은 주민들은 H빔을 쓰러트리고

올레7코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0만 평이 넘는 아름다운 바닷가를, 희귀 동식물들이 많고 자연경관이 하도 아름다워 절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바닷가를 시멘트로 뒤덮고 전쟁을 위한 기지로 만든다는 생각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

군주의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 분명합니다. 하루속히 평화의 섬 제주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평화가 회복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사랑의 삼위일체를 묵상하며 마음 한 편이 따뜻해지고 좋기도 했습니다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내게 사랑받기를 원해 찾아왔건만 사랑이 아닌 상처를 줘 돌려보냈던 사람들의 얼굴.

그들은 예수인 척하는 제 속에 있는 군주를 발견하고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착잡한 마음으로, 안드레이 루뷸로프의 <성삼위일체> 세 분 하나님이

사랑스레 눈빛을 주고받으시는 모습을 보다가 떠오른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곳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을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지도 몰라요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푸른 강가에서 만난다면
서로 하고프던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냥 마주보고 좋아서 웃기만 할꺼요
그곳 무지개 속 물방울들처럼
행복한 거기로 들어가
아무 눈물 없이 슬픈 헤아림도 없이
그렇게 만날 수 있다면
있다면
<하덕규, 좋은 나라>

우리 속에 있는 군주의 모습을 버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상처를 주고받던 사람들 모여 상처대신 사랑의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길 바랍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폭력성 때문에 얼룩지고 거북해진 삼위일체는

그 거룩하신 모습을 다시 우리 가운데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런 날이 속히 이루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