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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예배와 찬양은 어떤 것일까?

천국생활 2003. 3. 14. 12:48
진정한 예배와 찬양은 어떤 것일까?





1. 문제제기



현대 교회의 세속화 문제점은, 세상의 것과 인간적인 것을 받아들여 세상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독교 가치를 정립하려는 자유주의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는데 있고, 교회의 근본주의화 문제점은,
성경적인 근본만 지킬것을 주장하여 신앙과 이성을 분리하여 영적인 영역은 인정하고 육적인 활동들은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우를 범하게 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공예배가 성경적 세계관 안에
살아 있지 못함으로 인하여 객관적인 진리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과 하나님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크게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자유주의 예배와 근본주의 예배는 여론 조사에서 그 결과가 잘 나타났다.
미국 성인의 28%가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조지 바나의 여론조사).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기독교인 중에 오직 25%만이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이는 코람데오(Coram Deo = Before the face of God)의 영적예배가
사라지고 있다는것과 객관적인 진리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현실을 설명하는 조사이다.
설교가 짧을 수록 좋다고 하던 영국교회를 염려한 스펼젼 목사의 예견대로 오늘날 영국교회는 텅텅비게 되었고
사람이 좋아하는데로 예배와 찬양을 마음대로 만들어 이용하는 미국의 결과는 이렇게 불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준다.




2. 진정한 예배의 의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시키신 이후에 무엇을 요구하셨을가?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예배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히=아바드=일하다.봉사하다.노동하다=Worship=예배) 것이니라"(출애굽기 9:1).



신약에서 예배는 사람들의 이해 정도를 떠나서 우선적으로 구원 받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그리스도 께서는 구약시대 처럼 그의 백성들에게 예배를 요구하심은 물론이요 예배의 중요한 원리들을
제시하셨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예수님께서 '영으로' 예배할 때가 이 때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영'으로 소개한 것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말한 사마리아 여인의 이해를 고쳐주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더
이상 구약시대의 성전에 머물러 계시지 아니하시므로 예배장소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예배란 본질적으로 구원받은 백성들 즉 성령께서 성전삼고 계시는 움직이는 성전인 성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원 계시에 근거하여, 기독론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영광을 드리는행위이다.



예배당이라는 한 장소에 모여서 드리는 공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몸으로서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히 10:24,25).



예배당 예배의 문화적인 면은 예배의 부분적인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예배 안에 있다가
예배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령과 진정의 예배에 대하여 바울은 롬12:1에서 영적인 예배로 해석하고 있다.
칼빈은 해석하기를 나를 위해 예배하는 것과 나를 위해 찬양하는것,
나를 위해서만 생활하는것을 중지하라는 것, 거룩하심에 모욕이 되는 예배와 삶을 배제한 것을
영적예배라고 결론을 짓고 있다(칼빈 주석).구약시대에도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은 성막과 성전예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백성으로서 섬기는 전 삶을 의미하고 있다. 신약에서도 성령 안에 있는 자는
매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신령으로 예배하는 모습'이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영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아는것이며 그래서 제사 보다 순종의 우위성을 인정하는것,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줄 아는것을 의미한다(롬12:1-2)).
호세아는 예배의 본질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근세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추세가 예배당 예배를 하나의 종합 예술 작품처럼 취급하려는 듯 하나
분명히 말해 예배는 '창조적인 예술 작품'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힘써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히스롭(D.H. Hislop)은 그의 책 "Our Heritage in Public Worship(공중 예배에서의 우리의 전통)"에서 비유를 들어,
개혁주의 예배의 기본 틀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upward)"이라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틀(downward)"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즉 위로 향하는 예배는 예배의 초점이 예배드리는 예배자나 혹은 예배드리는자의 감정에게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받으시는 분께 두는 것이라는 말이다.



3. 열린 예배의 문제점



오늘날 열린 예배의 문제는 방법에 있다기 보다는 원론적인 문제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예배인가
하는 문제이다. 불신자들에게 까지 열려있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며 집회 또는 전도집회 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는것이 옳다. 예배는 예배답게 집회는 집회답게 드려야 하고 어중간한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수 없는 것이다.
용어를 비신학적인 용어로 만들어가는 것에 조심해야한다.
예를들어 중보기도 용어와 준비찬송, 열린예배가 그것이다.



공예배는 성도가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의 <중심>으로하여
우리의 부족한 예배를 사랑과 자비로 받으시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삼위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응답하는 예배가 되어야한다.
예배 형식의 갱신에는 한계가 있다. 예배 형식의 갱신은
소극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따라서 예배에서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일이
예배 갱신의 중요한 과제임과 동시에 그러한 의미에서의 예배 형식은 다양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살아있는 예배는 신령(성령)과 진정(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며 그것은 우리의 삶 전부를
성령께 의탁하고 말씀안에서 사는 삶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포함한다.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따른 적극적이고 진정한 예배 갱신은 우리의 삶의 갱신과 개혁을 포괄하는 것이다.



4. 진정한 찬양



예배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적인 삶이라고 할 때,
성경은 이 두 관계를 묶는 공통의 요소로서 '찬양'을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찬양'이 단순히 '노래한다'는 의미로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국에서의 매일 생활은 찬양 그 자체이다.
천국에서 매일 입으로만 찬송 부른다고 해석하는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1:46-47).



예수님께서 드리신 단번의 제사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율법의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어졌다.
유일하게 드릴 수 있는 제사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를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있었으니 우리는 마땅히 짐승의 제사를 드릴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을 성취하신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 찬양은 구약의 제사와 같은 항상 드리는 신약시대의 제사이다. 곧 우리의 모든 삶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찬양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찬양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의 전인적인 삶을 나타낸 표현인 것이다.



한국교회의 큰 문제점은 청문회와 옷로비 사건으로 확실하게 공개된것 같이
성도의 신앙과 생활의 이분된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임을 보여주면서
세상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된것이다. 그래서 개혁의 내용은 앞으로 단지
공 예배로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삶이 찬양이 되는 영적예배를 드릴수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가르쳐 주신 주기도는 이것과 맥을 같이 한다. 찬양은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로 인하여 임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이
우리로 인하여 이땅에 이루어지게 하는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못하는 찬송, 생활에서 찬송이없는 공예배안에서만의 찬송은 자기만족을 위하여
아니면 형식적으로 순서에 따라 습관적으로 드리는 찬송으로 끝나며
교회밖에서 찬송과 저주가 한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성회를 기뻐하지 아니하나니...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암5:21-24).




5. 결론



교회라는 예배 공동체는 주의 재림의 날에 '완전하고 영광스럽게 된 교회'(엡 1:4-5; 5:26-27)로 세우는
주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그날에 나타날
'완전하고 영화롭게 된 교회'의 그림자요 모형임을 인식하고 찬송과 예배를 드려야할 것이다.

찬양과 예배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라고 하는 저 하늘의 잔치에서 누릴
그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시는 은혜이다(계19:9)



<예배와 찬양의 초점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의복리가 아니다>. 예배와 찬양은 교회가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 만드신것이며 사람이 고안해 만든 이방종교와는 다른 것이다 (계4:8-11).

예배와찬양을 대중화 할수록 예배와찬양의 거룩에 대한 경외심이 퇴색되고
진정한 의미의 이해심이 사라지게 된다.



존 로빈슨(John Robinson)이 말한대로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눈 무리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그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 한 성만찬을 통한 예배의 의미는 사실상 무가치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예배자의 전생활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직결됨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삶에 밀접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예배 원리는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함으로 말씀을 읽고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찬양도 삶의 예배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나타날 때에 능력을 가진다.
공예배시의 찬양은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송축하는 것이며(시100:1-4; 22:3) 영광과 능력을
그 분께 돌리는 것이다(시29:1-2). 공적 예배에서의 찬양이 삶에서의 찬양을 능가 할수없다.
다윗은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하나님을 찬양했다. 단지 구원받은 정도의 은혜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었다.
밤중에 일어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다윗의 신앙은 공적 예배시의 찬양정도가 아니었다.
밤중에 수면과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더 좋아한 그러한 믿음의 찬양이
삶에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할때 공적 찬양은 더 은혜롭고 또한 감동적인
찬양을 드릴수가 있을것이다.



찬송가도 없이 감사한 마음도 없이 예배를 졸면서 드리거나 예배시간에 찬송을 한번도 함께
부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송축하는 사람이 아니고 구경꾼인 것이다.
예배를 드리지 않고 예배를 보는 사람 즉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질때
일어나 빛을 발할수가 없게된다. 사회의 부정부패와 동서갈등,남북갈등
그리고 환경파괴,도덕성 상실의 문제,전쟁의 위험, 굶고 고통당하는 지구인들에도
구경만하지 아무런 기도도 도움도 영향력도 행할수 없다.
왜냐하면 빛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반사할 빛도 없기 때문이다.

찬양대의 찬양 가사가 전달이 안되도록 부르거나 연주하는것은
회중을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주님의 요구하시는 삶을 살지 않고 찬양대에서 찬양하는것은 가증한 행위가 된다.
또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때에 교회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던지
내 편한대로 자기만을 위해 자리를 지키고 젊은이들에게 양보하지 않는 봉사도 문제이다.

우리는 '교회음악'을 생각할 때에 예수님이 생활을 통해 보여주신 찬양을 늘 함께 생각해야만 한다.
사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예배때에 얼마나 음악성을 가지고 잘 부르는냐, 얼마나 오래 찬양대에 봉사했는가를
따지기 보다는 생활 가운데에 무슨 노래를 하느냐를 따져보는 것이 더 정확한 답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열린예배와 열린찬양은 열린전도집회, 열린 성가이며 그 대상이 다른 것이다.
한국교회는 혼란을 초래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해석해준 바울의 결론에 주목해야한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는 말씀이다.



모든 예배의 갱신은 칼빈의 해석대로 성경에 없는것을 만들어 붙일수 없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다는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참석해 계시는데 공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답이 나온다.

불신자와 예배에 식상한 사람들을 위한 것은 사람끼리 모인 전도집회이므로 전도집회답게 목적에 맞게 진행하면 되는 것이고 공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거룩하게 드려야한다고 결론을 내릴수 있다 .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역상16:29,시96:8-9)).


찬송가 242장-- 교회의 참된 터는 [♬MID, ♪ASP]



1.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라 그 귀한 말씀 위에 이 교회 세웠네
주 예수 강림하사 피흘려 샀으니 땅위의 모든 교회 주님의 신부라


2. 온세계 모든 교회 한몸을 이루어 한 주님 섬기면서 한 믿음 가지네
한 이름 찬송하고 한 성경 읽으며 다 같은 소망 품고 늘 은혜 받도다


3. 땅 위의 모든 교회 주 안에 있어서 하늘의 성도들과 한몸을 이루네
오 주여 복을 주사 저 성도들같이 우리도 주와 함께 늘 살게 합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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