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가 흔들릴 때
시 11:1-7
(2019/04/28, 부활절 제2주)
[내가 주님께 피하였거늘, 어찌하여 너희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느냐? "너는 새처럼 너의 산에서 피하여라. 악인이 활을 당기고, 시위에 화살을 메워서 마음이 바른 사람을 어두운 곳에서 쏘려 하지 않느냐?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그의 성전에 계신다. 주님은 그의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다. 주님은 그의 눈으로 사람을 살피시고 눈동자로 꿰뚫어 보신다. 주님은 의인을 가려 내시고, 악인과 폭력배를 진심으로 미워하신다. 불과 유황을 악인들 위에 비오듯이 쏟으시며, 태우는 바람을 그들 잔의 몫으로 안겨 주신다. 주님은 의로우셔서, 정의로운 일을 사랑하는 분이시니, 정직한 사람은 그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다.]
∙어지러운 세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의 기쁨을 한껏 누리며 살고 싶지만 세상은 우리의 그런 바람을 허용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활절에 스리랑카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무슬림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명분이 무엇이든 타자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빼앗는 일은 악마의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최근에 정신적 문제가 있는 이들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범죄들은 우리 사회가 위험 사회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도처에서 라멕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가인의 후예인 라멕은 아내인 아다와 씰라에게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창4:23). 정치적인 난맥상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찢겨 있습니다. 요 며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서 국민들은 암담함을 느낍니다. 증오와 혐오의 말들이 넘치고 폭력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칠레의 저항시인인 파블로 네루다의 ‘침묵 속에서’가 자꾸 떠오릅니다. 그는 난폭한 이 세상을 향해 이런 제안을 합니다. “이제 열둘을 세면/우리 모두 침묵하자/잠깐 동안만 지구 위에 서서/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말자/우리 단 일 초만이라도 멈추어/손도 움직이지 말자”. 말이 비수가 되어 다른 이들의 가슴을 찌르고, 사람들을 가르고 있다면서 잠시 모든 말을 멈추자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시인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어딘가로 몰고 가는 것에/그토록 열중하지만 않는다면/그래서 잠시만이라도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다면/어쩌면 거대한 침묵이/이 슬픔을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어딘가로 몰아가는 열정이 때로는 우리 마음을 병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시인은 아무것도 안 할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시의 화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삶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의 선한 의지를 비웃는 이들이 많습니다. 가까운 이들조차 패배주의에 깊이 침윤되어서 시인에게 말합니다.
“너는 새처럼 너의 산에서 피하여라. 악인이 활을 당기고, 시위에 화살을 메워서 마음이 바른 사람을 어두운 곳에서 쏘려 하지 않느냐?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시11:1b-3).
시인에게 이런 충고를 하는 이들은 악인들이 아닙니다. 세상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알 정도의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기력한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세상에 적응하며 살던 그들은 한사코 적응을 거부한 채 세상과 불화하며 사는 시인을 딱하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세상의 기초가 흔들리는 마당에 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최소한의 용기
그들은 공의가 무너진 세상, 상식과 양심과 법이 작동되지 않는 세상, 종교조차 바른 길을 제시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꽤 적실한 충언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자기들의 비겁을 호도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달콤한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18세기 영국 사상가인 에드문트 버크(Edmund Burke)는 “악이 승리하기 위한 단 하나의 조건은 선한 이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The only thing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for good men to do nothing)이라고 말했습니다.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태도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동화입니다. 현실주의적인 선택입니다. 그들은 권력의 향배에 민감합니다. 언제나 권력의 편에 섬으로 자기 이익이나 안정을 보장받으려 합니다.
둘째는 냉소입니다. 이것은 약자들의 버릇입니다. 냉소를 통해 자기를 세상에 물들지 않은 사람인양 포장하려 하지만 사실상 그는 현실에 복무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회피입니다. 현실에 등을 돌린 채 홀로 고고하게 지내려 합니다.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할까요? 그들은 깨끗하지만 공적 책임의 영역에서 벗어남으로 자기들에게 주어진 책무를 소홀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저항입니다. 그들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합니다. 소신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내게 유익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입니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한다 해도 악인들이 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좋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용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뒷자리’라는 시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면서 불의와 맞서 싸우던 시절을 상기하며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맨 앞에 서진 못하였지만/맨 나중까지 남을 수는 있어요//남보다 뛰어난 논리를 갖추지도 못했고/몇마디 말로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 또한 없지만/한번 먹은 마음만은 버리지 않아요//함께 가는 길 뒷자리에 소리없이 섞여 있지만/옳다고 선택한 길이면 끝까지 가려 해요“
그가 이런 노래를 부르는 까닭은 남들보다 앞에 서서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사람들이 말을 바꿔 타는 것을 보았고, 가파른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익이 개입되는 순간 사람은 변질되게 마련입니다. 끝내 변질되지 않으려면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되어야 합니다.
∙보시는 하나님
시편 11편의 시인이 견결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굳게 붙들 때 우리는 비틀거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패배해도 하나님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있기에 당당하고, 우리가 심는 씨가 때가 이르면 싹이 틀 것을 알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다녀온 캘리포니아는 꽃동산이었습니다. 겨울비가 많이 내린 덕에 온 들과 산에 꽃이 무진장으로 피어나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능력과 때를 신뢰하는 이들이라면 괜한 우울과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명랑하게 주님의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의 성전에 계신다. 주님은 그의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다. 주님은 그의 눈으로 사람을 살피시고 눈동자로 꿰뚫어 보신다. 주님은 의인을 가려 내시고, 악인과 폭력배를 진심으로 미워하신다.”(시11:4-5)
‘계신다’라는 말은 평범하지만 강력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나는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일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자유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1930년에 제정된 감리교 교리적 선언 제 1조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만물의 창조주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시요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은 아니 계신 듯 보여도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십니다. 계신 하나님은 또한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과 사람을 살피실 뿐 아니라 의인과 악인을 가려내십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폭력배를 미워하시기에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시듯 우리도 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라고 있는 하나님 나라도 볼 수 있어야 하지만, 불의를 불의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불의를 멈추게 해야 합니다. 작가이자 비평가인 리베카 솔닛은 “무지는 일종의 용인”이라면서 “무지는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죽는지, 왜 그러는지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 것”(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김명남 옮김, 창비, 2018년 10월 25일, p.28)이라고 말합니다. 히틀러가 지배하던 제3제국 시민들은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갈 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우리는 그런 줄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선한 이들의 침묵이 악을 번성하게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그러나 정직한 사람, 정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얼굴을 뵙는다는 것은 친밀하게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주님과 만났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 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불의 앞에 절하지 않을 때, 그래서 시련과 고난이 닥쳐올 때, 바로 그 때가 주님이 가장 가까이 계실 때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면서도 한사코 그 길을 외면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좁은 길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유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과 의지는 그런 삶을 지향하지만, 우리 몸은 그런 삶을 싫어합니다. 몸의 욕구가 이성과 의지를 압도할 때 우리는 습관의 폭력에 속수무책인 사람이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호르헤라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고 또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놀란 것은 그 다음 대목입니다. “그분은 내게 아주 중요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움(廉恥)
의 은총(the grace of shame)입니다“. 부끄러움의 은총이라는 말이 참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는 부끄러움이 참 중요하다면서 “부끄러움은 당신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들지만, 그것은 또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당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오만과 허영심에 빠지지 않도록 해줍니다”(Pope Francis with Antonio Spadaro,
주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빛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지 않음을,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 부끄러움의 은총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조심스럽게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습니다. 현실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삶의 기초가 속절없이 흔들리는 시대입니다. 의로운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비관주의가 스멀스멀 우리 속에 기어드는 때입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악한 이들이 만든 거짓 신화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스러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숙명론자들이 아니라, 숙명의 잡아당기는 힘을 떨치고 나아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이들입니다. 어제 4.27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맞아 강화에서 고성까지 DMZ 평화 손잡기 행사가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평화 통일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것은 거대한 진보입니다. 꿈을 나눈다는 것, 내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곁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시작하십시오.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누가 뭐라 하든 명랑하게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십시오. 주님은 그런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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