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차이보다 중요한 것

천국생활 2016. 4. 28. 18:32

차이보다 중요한 것
룻 2:5-13
(2016/04/24 부활절 제5주)

[보아스가 일꾼들을 감독하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저 젊은 여인은 뉘 집 아낙인가?" 일꾼들을 감독하는 젊은이가 대답하였다. "저 젊은 여인은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사람입니다. 일꾼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곡식단 사이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더니, 아침부터 와서 지금까지 저렇게 서 있습니다. 아까 여기 밭집에서 잠깐 쉬었을 뿐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였다. "여보시오, 새댁,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이삭을 주우려고 다른 밭으로 가지 마시오. 여기를 떠나지 말고, 우리 밭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바싹 따라다니도록 하시오. 우리 일꾼들이 곡식을 거두는 밭에서 눈길을 돌리지 말고, 여자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줍도록 하시오.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는 댁을 건드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겠소. 목이 마르거든 주저하지 말고 물단지에 가서, 젊은 남자 일꾼들이 길어다가 둔 물을 마시도록 하시오." 그러자 룻은 엎드려 이마를 땅에 대고 절을 하면서, 보아스에게 말하였다. "저는 한낱 이방 여자일 뿐인데, 어찌하여 저같은 것을 이렇게까지 잘 보살피시고 생각하여 주십니까?" 보아스가 룻에게 대답하였다. "남편을 잃은 뒤에 댁이 시어머니에게 어떻게 하였는지를, 자세히 들어서 다 알고 있소. 댁은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태어난 땅을 떠나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알지 못하던 다른 백성에게로 오지 않았소? 댁이 한 일은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룻이 대답하였다. "어른께서 이토록 잘 보살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른께서 거느리고 계신 여종들 축에도 끼지 못할 이 종을 이처럼 위로하여 주시니, 보잘것없는 이 몸이 큰 용기를 얻습니다."

• 메길로트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나날을 꿈꾸지만 세상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가난한 나라 에콰도르의 강진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전경련과 재향경우회의 돈이 어버이연합 등 보수 우익 단체에 흘러들어간 정황이 포착되면서 우리 사회가 다시 한번 들끓고 있습니다. 미움과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들이 돈을 앞세워 세상을 조각내고 있음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헐값을 주고 탈북자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증오의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의 죄가 큽니다. 고통과 억압을 피해 떠나 온 이들의 품이 되어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딱합니다. 미세 먼지 자욱한 하늘 아래를 걷는 것처럼 답답한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옹골차게 살아내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지속됩니다. 지금 우리는 절기상으로 곡우 절기 한복판에 있습니다. 이맘 때면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해집니다. 못자리도 준비해야 하고, 무·토란·도라지·당근 등 뿌리남새의 씨도 뿌려야 하고, 오이·호박·가지·참외·토마토 등 열매남새의 씨도 뿌려야 합니다. 힘겨운 때이기도 하지만 왕성한 생명의 기운이 절로 느껴지는 때입니다. 이 무렵이면 사람들은 산다래, 자작나무, 박달나무 등에 상처를 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곤 했습니다. 그것을 곡우물이라 합니다. 힘겨운 농사 일을 앞두고 힘을 내자는 의미일까요? 창조의 리듬을 거스리지 않고 살았던 이들의 지혜가 그러합니다.

유다인들은 일년 중 주요 절기마다 메길로트(Megilloth), 곧 다섯 개의 축제 두루마리를 읽었습니다. 룻기, 아가, 전도서, 애가, 에스더가 그것입니다. 아가서는 유월절에 읽었는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전도서는 초막을 짓고 그 속에 머물던 '초막절'에 읽었습니다. 임시 가건물에 지나지 않는 초막과 모든 것이 헛되다는 가르침이 연관되고 있습니다. 애가는 예루살렘의 멸망 기념일에 낭독되었습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 통치자들의 학살을 모면한 부림절기에 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인 룻기는 보리수확 절기의 축제인 오순절에 읽었습니다. 이삭을 줍는 룻의 모습이 절로 그려지기 때문일 겁니다. 유다인들이 절기마다 그런 텍스트들을 낭독한 것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기억을 이어가려는 것입니다. 동일한 텍스트를 매해 특정한 절기에 낭독함을 통해 기억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들이 운명 공동체임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기억의 축제에 동참하는 이들은 비록 서로 다른 형편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자기들이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재확인하면서 마음의 고향 하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룻기는 문학적으로 보아도 아주 짜임새 있는 문헌입니다. 인물들의 성격도 뚜렷하고, 플롯 또한 정교합니다. 기근 때문에 고향 땅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간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가장인 엘리멜렉은 그곳에서 아내인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남겨두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말론과 기룐은 그곳의 원주민인 룻과 오르바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하지만 그 두 아들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모압으로 이주한지 십 년 만에 나오미는 기근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길을 떠나면서 나오미는 청상과부가 된 두 며느리에게 고향에 남아 새로운 가정을 꾸리라고 말합니다. 오르바는 눈물로 시어머니와 작별하고 고향에 남았지만, 룻은 기어코 나오미를 따라나섭니다. 만류하는 나오미에게 룻이 한 이야기는 가슴 절절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 취약해진 사람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1:16-17)

남편과 장성한 두 아들까지 잃고 쓸쓸하게 귀향하는 시어머니를 차마 홀로 버려둘 수 없어 그와 동행하려 한 룻의 마음은 연민이라는 단어로도 다 담아내기 어렵습니다. 낯선 땅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문화적 습속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입니다. 자기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소수자로 살아가야 함을 뜻합니다. 낯선 땅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삶이 힘겨워질 때 슬그머니 찾아갈 기댈 언덕을 포기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향을 떠날 때 룻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룻을 이상화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간 오르바를 무정한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의 척도를 가지고 그 두 여인을 재단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룻의 자기 희생이 놀라운 따름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룻을 메시야의 표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룻은 예수님의 족보에도 등장합니다.

2장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두 여인의 삶이 얼마나 곤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먹고 살 길이 막연했습니다. 룻은 선량한 사람을 만나면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울 수 있을 거라면서 밭에 나가보겠다고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다른 방도가 없었던지라 나오미는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힘겨운 노동을 감당하느라 거친 농지기를 던지며 일하는 남자들 틈에서 여성들은 참 취약한 존재입니다. 게다가 남의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와 더불어 연명하려는 이방 출신의 여인은 가장 연약한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칫하면 시선의 폭력과 언어 폭력, 더 나아가서는 성적 폭력에 노출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룻이 이삭을 줍던 밭은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추수를 독려하기 위해서 밭에 나왔던 보아스는 낯선 여인을 발견하고는 일꾼들을 감독하는 젊은이에게 그가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 젊은 여인은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사람입니다. 일꾼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곡식단 사이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더니, 아침부터 와서 지금까지 저렇게 서 있습니다. 아까 여기 밭집에서 잠깐 쉬었을 뿐입니다."(2:6-7) 하고 대답합니다.

보아스는 룻을 불러 이삭을 주우려고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일하는 여자들을 바싹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우라고 이릅니다.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는 추근거리지 말라고 엄히 일렀다면서, 목이 마르거든 서슴치 말고 일꾼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시라고도 말합니다. 감동한 룻은 이방 여인에 불과한 자기를 왜 이리도 살뜰하게 보살펴 주냐면서 이마를 땅에 대고 절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남편을 잃은 후에 룻이 그 시어머니를 위해 한 모든 일을 알고 있었노라면서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2:12)이라고 축복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일가붙이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룻이 아름다워서였을까요?

• 경계선 지우기
이 질문을 잠시 남겨두고 다른 데 눈길을 돌려보겠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보아스가 다윗의 증조할아버지(오벳-이새-다윗)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가 여리고 성이 함락될 때 이스라엘을 도왔던 기생 라합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라합의 집은 여리고 성벽 위에 있었습니다. 성벽은 성 안과 성 밖의 경계지점입니다. 어쩌면 그 사실 자체가 라합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라합은 사실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위계질서가 뚜렷했던 성 안의 세계에서 약자들은 늘 유린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합은 그것이 불의한 질서임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출애굽을 단행한 히브리인들의 대의에 공감했고 그래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던 것입니다. 여리고 성 안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라합은 배신자입니다. 하지만 라합은 불의한 세계 질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주 습속의 지배를 받습니다.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경쟁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내편의 무리한 반칙은 너그러이 용납하지만 상대편의 반칙은 절대로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인위적인 경계짓기에 익숙합니다. 나라, 인종, 종교, 문화는 사람들을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하곤 합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 동일성의 폭력입니다. '우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위험하거나 불길한 존재로 취급됩니다. 그들은 제거되어야 할 적으로 규정되기도 합니다. 지금 미국은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예비 선거가 한참입니다. 민주당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이, 공화당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정말 뜻밖입니다. 미국의 소수자 집단과 이슬람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고 있는 트럼프가 저렇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면 미국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트럼프는 그런 미국민들의 불안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사람들을 위 아래로 나누는 세상,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확연히 갈리는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권을 존중받으며 사는 세상을 꿈꾸며 애굽을 떠나온 히브리인들의 꿈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에게 배운 것일까요? 보아스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경계 안에서 사고하지 않습니다. 그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고통 안으로 뛰어든 룻의 선택을 귀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룻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려 합니다. 환대란 누군가에게 설 땅을 허락해주는 것이고, 그가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도록 돌봐주는 것입니다. 나라, 인종, 피부색, 종교, 문화의 차이를 넘어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인간의 취약성입니다. 그의 아픔과 슬픔을 나의 것으로 수용할 때 세상은 따뜻해집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유입된 새로운 질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3:28)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3:11)

• 하나의 세상
사람들은 남과 내가 어떻게 다른가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아갑니다. 젊은이들은 스펙쌓기에 열중하고, 나이 든 이들은 자기를 남들과 구별해주는 기호를 소비하느라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남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릴 때 사람들은 일종의 쾌감을 느낍니다. 이게 타락한 세상의 속성입니다. 하지만 차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고,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존재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위해 공간을 내주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영연방 최고 랍비인 조너선 색스는 "세상에는 많은 문화와 문명과 종교가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함께 살아갈 하나의 세상만 주었다"(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임재서 옮김, 말글빛냄, 2007년 8월 2일, p.52)고 말합니다. 보아스는 연민의 시선으로 룻을 바라보았습니다. 새로운 질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보아스는 룻을 아무런 편견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룻을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 받으러 온 존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날개가 되어 그 취약해진 사람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구마모토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성금을 내셨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아픔을 겪었던 이들이기에 지금 아픔을 겪는 이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되어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정성이 냉랭한 우리 사회를 정화하는 훈풍이 되고 있습니다. 이 마음 하나가 없어 우리 사회는 지옥으로 변해갑니다. 예수님이 꿈꾸셨던 하나님 나라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우정과 사랑의 나라를 시작하는 우리를 통해 이 땅에 도래합니다. 농부들이 씨를 뿌리기에 분주한 이 절기에 우리 또한 삶의 자리 곳곳에 사랑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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