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왜 자고 있느냐?

천국생활 2016. 3. 22. 17:20

왜들 자고 있느냐?
눅22:39-46
(종려주일)

[예수께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를 따라갔다. 그 곳에 이르러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신 뒤에, 그들과 헤어져서, 돌을 던져서 닿을 만한 거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때에 천사가 하늘로부터 그에게 나타나서, 힘을 북돋우어 드렸다.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제자들에게로 와서 보시니, 그들이 슬픔에 지쳐서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자고 있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서 기도하여라."]

할렐 찬양을 부르며
종려주일 아침,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 세 번씩이나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일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16:21). 예루살렘, 그곳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모든 유대인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순례할 날을 기약하며 힘겨운 나날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세상의 중심, 우주의 배꼽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 곧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의 존경과 아울러 더할 나위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존경과 특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의 전락은 시작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이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예언자들의 무덤이 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눅13:34)

거룩한 것이 타락하면 마성적인 것(the demonic)으로 변합니다. 유대교 전통은 악의 뿌리를 타락한 천사에게서 찾습니다. 종교가 인간의 욕망과 결합하는 순간 폭력조차도 서슴치 않게 됩니다. 자기 옳음을 과할 정도로 확신하는 이들은 자기와 생각이나 세계관이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 신에게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방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던 십자군 전쟁이 그 예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은 가톨릭과 개신교도들 사이의 전쟁으로 처절하게 찢겼습니다(1617-1648년 사이에 벌어진 삼십년 전쟁).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테러의 뿌리에는 자기 신앙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타자의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일은 종교적 명분이 어떠하든 악마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성전체제의 대변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그들의 위선을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셨고, 결국 예루살렘이 망하고 말 것이라 가르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은 예수를 없애버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닥쳐올 고난의 시간을 예고하신 후,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셨습니다. 마태복음은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올리브 산으로 갔다"(마26: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찬송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때 부르는 할렐 찬송을 말하는 것으로 시편 113편부터 118편 사이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백성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셨는지를 잘 반영하고 있는 시편들입니다.

• 올리브산
올리브 산은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과 마주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드론 골짜기를 여호사밧 골짜기라고도 불렀습니다(욜3:12).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곳에서 만민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골짜기 한켠에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많은 유력한 유대인들의 묘소가 몰려 있습니다. 그 영광의 날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반영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올리브 산으로 가려면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야 합니다. 어쩌면 주님은 그곳을 지나며 미구에 닥쳐올 예루살렘의 파멸을 내다보며 마음 아파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체포 당하시기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던 곳을 누가는 그저 올리브 산(감람산)이라고 말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그곳을 '겟세마네'라고 특정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란 히브리어로 '기름 짜는 기계'라는 뜻인데, 하늘의 뜻을 묻기 위해 땅에 엎드려 절박하게 기도를 올리던 예수님의 이미지와 묘하게 연결됩니다. 요한은 그곳을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 동산(요18:1)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동산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 이후 묻히신 곳을 말할 때도 '동산'이라는 표현을 씁니다(요19:41).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이 마리아에게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에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요20:15). '동산' 하면 사람들은 에덴 동산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그곳은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동산 이미지를 통해 아담의 불순종에 대비되는 예수님의 순종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올리브 산에 들어가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신 뒤에, 그들과 헤어져서, 돌을 던져서 닿을 만한 거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40-41)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마26:36) 하신 후에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셔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심정을 여과없이 드러내셨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26:38). 예수님이 이렇게 직정적으로 당신의 고뇌를 드러내신 것은 이 대목이 유일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도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황혼 무렵 산그림자가 서서히 마을을 뒤덮는 것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옴을 느낄 때 그것을 선선히 기쁘게 맞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혹시 연세가 많으신 분들 가운데는 그럴 수 있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우 30대 초반의 젊은이입니다. 십자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고뇌, 영혼의 폭풍을 뚫고 나아가 선택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세 제자에게 부탁하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여기에 머물러라',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주님은 그들에게 충고를 부탁하신 것이 아닙니다. 격려의 말을 원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고뇌의 시간을 함께 해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가슴에 느꺼워집니다.



• 고뇌에 찬 기도
고뇌의 시간을 함께 해달라고 청하셨지만 주님은 그 고뇌의 시간을 홀로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을 던져서 닿을 만한 거리에까지 물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42)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그 고통의 시간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백척간두에 매달려 있습니다. 어질어질한 현기증이 그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평범한 삶임을 잘 압니다. 아주 폭력적인방식으로 일상과 단절된 곳에서 지내본 이들은 잘 압니다. 일하고, 사랑하고, 공부하고, 놀고, 음식을 먹고, 더러 다투기도 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말입니다.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도, 선술집에서 들려오는 와글와글한 소음도 정겹게 느껴집니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의 행복한 걸음걸이도 신비하고, 뉘엿뉘엿 지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도 신비합니다. 삶의 극한에 서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열정이 허망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곤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살고 싶은 생명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난의 쓴 잔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간절히 기도를 올렸지만 하나님은 깊은 침묵 속에 머무실 뿐입니다. 자신보다도 가까이 계셨던 주님이 갑자기 사라지신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신뢰의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 고뇌하는 모습을 축소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 이 기도의 상황이 간명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꺽쇠 표시가 되어 있는 43절과 44절, 즉 천사가 나타나서 힘을 북돋워 드렸다든지,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자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는 대목은 나중에 가필된 것입니다. 일본 작가인 엔도 슈사꾸는 예수님의 이 기도의 의미를 이렇게 새기고 있습니다.

"예수는 죽음의 불안과 싸우고 있었다. 영원히 인간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 사랑의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가장 비참한 모양으로 자신이 죽지 않으면 안되었다. 인간이 맛보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나눠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향해, 보라, 내가 곁에 있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아니 당신 이상으로 괴로와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향해, 당신의 슬픔을 나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나도 그것을 맛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엔도 슈사꾸, <예수의 생애>, 김광림 옮김, 홍성사, 1993년 9월 15일, p.142-143)

죽음의 불안과 싸웠던 그 시간이야말로 예수님을 영원히 인간의 동반자로 만드는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깊은 번뇌의 시간은 역설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계기였다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같은 기도를 드리셨다고 전합니다. 물론 그 세 번의 기도는 주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세 번의 시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험을 받으실 때 주님은 달콤한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올리브 산에서의 기도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올리브 산의 기도는 감리교회의 언약 갱신 예배의 첫 기도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오라 주님의 것이오니, 주님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믿음이란 단순한 신뢰입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신뢰하며 우리 운명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 연약함을 껴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 진정한 믿음의 길에 접어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승의 고뇌를 알지 못합니다. 주님이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와 보시니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누가는 이대목에서 많이 망설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무감각함과 못남을 부각시킬까? 그들의 연약함을 드러낼까? 누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표현이 "그들이 슬픔에 지쳐서 잠들어 있었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대목에서 조금 본문에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라고 할 때 '일어나다'라는 단어(anastas)는 사실 부활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마친 후 예수님은 확고하게 일어서신 것입니다. 더 이상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오롯이 받들 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라는 단어는 이 대목을 끝으로 누가복음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후에는 '열둘'(22:47), '사도들'(24:11), '그들'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제자'는 문자 그대로 배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제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교훈을 주십니다.

"왜들 자고 있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서 기도하여라."(46)

이때 '자다'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진 상태를 가리키지만, 이 대목에서는 몽롱함 속에 빠져 있는 정신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려는 이들은 늘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시험이나 시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다면 시험에 빠져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들 자고 있느냐?" 이 말씀이 우렁우렁 가슴에 울려옵니다. 지금 우리도 여전히 몽롱함 속에서 갈짓자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를 주님(Lord)이라 고백하면서도 다른 주들(lords)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돈을 위해 양심을 팔고, 권력을 얻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고, 명예를 얻으려고 자기의 존엄을 내려놓고 사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갈릴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간의 슬픔이 강물처럼 흐르는 그곳,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그곳, 사회적 약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그곳에서 주님은 지금도 생명 평화 세상을 열기 위해 땀흘리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자리를 잊지 않으려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믿을 만한 게 못됩니다. 시련이 닥쳐오기 전, 베드로는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눅22:33)라고 장담했습니다. 그것이 그때 그의 진심임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어리석음이고 몽롱함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스가랴를 통해 주님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슥4: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자꾸만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입니다. 약해진 것을 강하게 하시고, 이지러진 것을 온전케 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고난 주간을 지나는 동안 올리브 산 위에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고투하시던 주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경험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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