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을 배우다
히5:7-10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에게서 멜리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 구리 거울 속의 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청명하기 이를 데 없는 맑은 하늘을 보면 마음이 시원해지다가도 괜히 서러워집니다. 그 맑은 하늘과 대조되는 땅의 음습함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비루한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의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그저 맑기만 합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맑음을 되찾기 위한 여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속에는 적어도 하나님을 반영하는 뭔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정교회의 이콘을 보면 악인이나 사탄까지도 흉칙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타고난 악인이 아니라 빛을 잃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 정교회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윤동주는 1942년 1월 말 경에 <참회록>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 겨우 스물 네 살에 불과했던 시인은 왜 이런 자괴감에 사로잡힌 것일까요? 그때 그는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실이 이 예민한 젊은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고 다짐합니다. 여기서 '거울'은 마음을 이르는 은유일 것입니다. '닦어 보자'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본바탕이 맑음임을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것입니다. 자칫하면 수치와 부끄러움에 떠밀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자기 삶으로 수용하면서도 자기 마음의 본바탕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하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거울만 흐린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거울도 흐리지 않은가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본래의 모습을 잃은 채, 파란 녹이 낀 모습을 그냥 우리 현실로 수용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을 따라가느라 숨이 가빠서 우리가 본래 가야 할 곳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겉사람을 가꾸는데 진력할 뿐 속사람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자신에게 몰두하느라 함께 살라 하신 이웃들의 고통을 모른 체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덧거친 세상사에 시달리는 동안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온통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음을 자꾸만 본래의 자리에 되돌려놓기 위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핍과 욕망, 아픔과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부자유한 삶이고 타락한 삶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연주하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참을 찾아가는 이들이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5:7a)
이 구절을 볼 때 우리는 즉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떠올립니다.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주님이 그렇게 기도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고뇌에 차서 간절히 기도하셨다(누가)든지 괴로워하셨다(마가)는 표현만 나올 뿐입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연결시키는 까닭은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라는 표현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이 예기되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을 것만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 구절을 그렇게만 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일생 자체가 기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죄와 어둠과 슬픔을 보고 아파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바치신 '기도와 탄원'은 당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5:7b)
'예수의 경외심'이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하여 자기를 온전히 내려놓은 삶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합니다. 성공회의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는 예수님의 삶을 연주자들에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가수나 연주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다른 이들의 작품과 비전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 작곡가의 상상과 비전은 연주자의 존재를 '가득 채우며'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감동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목적을 쉼 없이, 음정을 놓치거나 박자를 틀리는 일이 없이 온전히 표현해내셨습니다. "그의 삶의 모든 면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 펼쳐 내는 하나의 연주"(로완 윌리엄스, <신뢰하는 삶>, 김병준·민경찬 옮김, 비아, 2015년 7월 7일, p.107-109 참고)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의 삶을 보시고 세상을 위해 바치신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 응답이 없다면 우리 삶이 하나님의 선율을 혼신의 힘으로 연주하는 삶인지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아픔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아픔 때문에 우는 사람,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분의 기도를 하나님이 어찌 외면하실 수 있겠습니까? 불의한 세상에서 부르짖는 의인들의 기도가 마치 허공을 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해야 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헛되이 흩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기도를 드린 후에는 그 기도가 응답된 줄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바라는 바를 아뢰는 것(祈禱)이기도 하지만 바라는 바를 기획하고 도모하는 일(企圖)이기도 합니다. 영국교회의 아침 기도문에는 "오늘 하루, 나의 삶이 누군가가 주님께 바친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런 진실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 순종을 배우심
8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이 구절은 평범하게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은 늘 가르치는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제자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말입니다. '배움'은 본래 자신의 무지 혹은 무능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즉 완전한 인간으로 보기에 '배우셨다'는 말에 당황합니다. 하지만 배움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익혔고, 고통 받는 이들 곁으로 다가섬을 통해 사랑을 배우셨습니다. 루소는 인간의 본래적 허약성을 인지하는 것만이 우리를 사회적 존재로 만들고 인간다움의 가치로 향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그 '부적합성'이야말로 공동체다운 공동체에 대한 희망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마사 누스바움,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우석영 옮김, 궁리, 2012년 4월 5일, p.72 요약). 자신의 한계를 알 때 사람은 비로소 다른 이들의 아픔 또한 알게 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된다는 말일 겁니다.
주님이 겪으셨던 고난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겪은 아픔이 아닙니다. 악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아픔입니다. 고통을 겪을 때 사람들은 대개 의기소침해지거나 이기적이 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얼이 살아있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 더욱 맑아지고 단단해집니다. 오산학교를 세우신 남강 이승훈 선생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갇혀다가 1915년에 출옥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감옥이란 이상한 곳이야. 강철같이 굳어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처럼 흐느러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거든." '겨릅대'는 껍질을 벗긴 삼대를 이르는 말입니다. 겨릅대는 똑똑 부러집니다. 하지만 고난을 통해 강철같이 단련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롬8:31, 33-34a). 주님은 제자들에게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10:28) 이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당국의 명령을 어기고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쳤다며 위협하는 대제사장에게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5:29) 하고 응대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자유에 이른 사람의 말입니다. 이런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자발적으로 고난 속으로 걸어들어가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 안에 확고히 거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신 예수님은 마침내 완전하게 되셨다고 말합니다. 완전이란 하나님과의 틈 없는 일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14:11)는 말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맥락에서 완전하게 되심은 부활 혹은 하나님께로 올리우심을 이르는 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대목과 연결이 됩니다.
• 다리 놓는 사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고 마침내 완전하게 되신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말은 주님의 길을 자기 길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 중심적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를 자기 중심성의 덫에서 풀려나 이웃들 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익에 발밭은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의 길은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길입니다. 하지만 오직 그 길만이 세상에 평화와 생명을 가져오는 길입니다. 자기를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는 행위가 아니고는 평화를 만드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불화를 일으키는 이들을 제거하면 평화가 정착되리라 생각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숙대 교수인 김응교 선생은 "어떤 여행이든 그 종착점이 새로운 중심, 곧 설움 '곁으로' 향하는 여행이라면, 그 길은 순례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 될 것"(김응교, <곁으로>, 새물결플러스, 2015년 8월 31일, p.48)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오늘 고통받는 이들 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것은 우리 곁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과 만난 그 감격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레위 가문에 속한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 이야기는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아브람은 여러 부족들이 벌인 전쟁의 와중에 사로잡혀간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 삼백 열여덟 명을 데리고 단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치열한 전투 끝에 적들을 물리쳤고 롯은 물론 빼앗겼던 재물까지 다 되찾아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소돔 왕은 사웨 벌판 곧 왕의 벌판까지 나와 아브람을 영접했습니다. 그때 살렘 왕인 멜기세덱 또한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 곧 엘 엘리욘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원수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요구합니다. 아브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창14:17-20).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정의의 왕, 평화의 왕으로 소개됩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생명의 끝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했는데, 축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받는 법이라면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소중한 존재임을 부각시킵니다. 성전 체제를 떠받들고 있던 레위 계통 제사장들을 통해서는 더 이상 구원을 이룰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새로운 계통의 제사장을 보내주셨습니다. 그가 바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대제사장 예수입니다. 그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 단번에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대제사장 혹은 교황을 이르는 말이 폰티프(pontiff)인데 이 말은 로마의 대신관을 가리키는 pontifex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폰티펙스는 본래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대제사장 예수라는 말이 어색하거든 다리를 놓는 사람 예수라고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하늘과 땅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 서로 소통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는 예수님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심으로써 모두가 한 가족이 되어 살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엡2:11-22).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이러한 사건이 자꾸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신 것처럼 우리도 화해의 사절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삶으로 익혀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삶으로 연주해야 할 하늘의 선율은 평화와 생명이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 이런 소명을 이루는 기쁨으로 우리 삶이 아름답게 무르익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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