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와 더불어 살기
레19:33-34
[외국 사람이 나그네가 되어 너희의 땅에서 너희와 함께 살 때에, 너희는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 고향 상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백로 절기에 접어들어서인지 이젠 한결 시원해졌습니다. 오랜만에 농가월령가를 찾아 8월령을 읽었습니다. 몇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선선한 조석 기운 추의秋意가 완연宛然하다", "아침에 안개 끼고 밤이면 이슬 내려, 백곡을 성실成實(열매를 맺음)하고 만물을 재촉하니, 힘들인 일 공생功生하다(공이 나타나다). 백곡의 이삭 패고, 여물 들어 고개 숙어, 서풍에 익은 빛은 황운黃雲이 일어난다." 들녘의 풍경이 마치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런 흥감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제 마음은 자꾸만 저 지중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로 달려갑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아일란 쿠르디의 모습을 담은 사진에 이어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 당도한 시리아 난민 사진이 무지근한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빽빽한 콩나물 시루 같은 조그마한 고무보트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온 한 난민은 자갈투성이 해안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린 채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아마도 울음으로 터져나왔을 것입니다. 자기가 살던 고향 땅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해야 했던 이들의 시린 마음이 자꾸만 떠올라 요즘은 편치 않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풍습도 다른 땅에서 그들은 나그네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어쩌면 평생 '난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무한도전이라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던 우토로 마을 사람들도 떠오릅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가 평생을 난민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나마 고마운 것은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난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9월 3일자 한겨레신문 12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1일 독일 뮌헨역 광장에선 수백명이 독일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일부에선 벅찬 감정에 겨운 울음도 터져나왔다.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제 막 도착한 시리아 난민들이, '난민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펼침막을 들고 광장에서 자신들을 맞은 독일 시민들에 대한 감동의 화답이었다."(한겨레신문, 2015년 9월 3일자 12면) 뮌헨역 광장에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부스, 간이화장실, 이주자 등록센터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먹을 것과 생수를 비롯한 기부 물품이 넘치도록 쌓였다고 합니다. 생업을 접고 나온 자원봉사자들도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독일에 난민들의 유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건전한 시민들은 기꺼이 난민들의 품이 되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문화의 성숙도는 고통받는 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예기되는 어려움이 많을 텐데도 독일은 참 좋은 선택을 했습니다. 베를린에 본부를 둔 시민단체 '난민 환영'은 시리아,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전쟁을 피해 떠나온 이주자들에게 자기 집에서 임시로 숙박을 제공하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고, 많은 이들이 거기에 호응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 집 대문을 열고 낯선 타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편한 일이기도 하고, 위험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타자의 고통 앞에서 차마 등을 돌릴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인구 33만 명에 불과한 아이슬란드에서는 한 유명 작가의 제안으로 1만 명의 시민이 시리아 난민들을 자기 집에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실현될지는 좀 두고 봐야 하겠지만, 저는 이것을 적대감이 가득 찬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희망의 조짐으로 보고 싶습니다. 상처입은 새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 이들의 품이 되어 주려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 인류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오래 전 마종기 시인의 <겨울 기도>를 만난 후 제 기억 속에 갈무리해 둔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잊지 않게 하시고/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고마워하게 하소서."
우리는 하늘과 부모와 벗들이 이불이 되어 우리를 덮어준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생명이 사랑의 빚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지금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의 벗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참 사람인지를 묻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 나그네 영접
제1성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토라의 중심 사상을 어느 성서학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받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래서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약자들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시지 못하는 하나님의 커밍아웃인 셈입니다. 고대세계에도 약자들에 대한 관심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의 발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평화롭게 다스렸다./나는 나의 지혜로 그들을 보호하였다./그리하여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지 못하고,/정의로 고아, (그리고) 과부를 다루게 되었다"(크리스티아나 반 하우튼, <너희도 이방인이었으니>, 이영미 역,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8년, p.40). 이 법전은 약자 보호가 왕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성경의 약자 보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와 다릅니다. 첫째, 약자 보호는 왕의 의무 혹은 호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당연한 법으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둘째, 약자 보호법은 자국민 뿐만 아니라 떠돌이나 외국인까지 내포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보편적인 인권 보호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그네, 객, 외국인 등으로 번역된 단어는 '게르'입니다. 게르는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을 떠나 낯선 곳에 거주하게 된 된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도 자신을 나그네 곧 게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게르는 대개 전쟁, 기근 등의 이유로 낯선 땅으로 이주한 이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의 성조들은 다 게르입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아주 취약한 상황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모멸과 멸시가 일상이었고, 폭력 앞에서도 속수무책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아, 나그네와 더불어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였습니다.
안식일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얼마나 천대받았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안식일에는 아무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후 계명은 그 법의 적용을 받는 이들을 열거합니다. 너희, 너희의 아들이나 딸,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 너희 집짐승이 죽 열거된 후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입니다(출20:10). 게르들의 처지는 짐승보다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보호 장치를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성결법전은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되고, 떨어진 이삭을 주워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레19:9).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법전은 매 삼년 끝에 드리는 십일조의 용도를 아주 분명하게 명토박아 놓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신14:28-29). 동족끼리 소송이 벌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과 외국인 사이의 소송이 벌어질 때에도 재판을 공정하게 하라는 명령도 있습니다(신1:16-17).
• 다문화 사회로 이행 중인 한국
오늘 본문은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는 대명제에 걸리는 말입니다. 거룩한 삶을 가르치는 대목 가운데 일부라는 말입니다. 나그네가 되어 그 땅에 머물고 있는 외국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 것, 그들을 본토인처럼 여기고,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삶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명령입니다. 일상적으로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 희생양 취급을 받는 사람들을 귀히 여기는 것과 거룩한 삶은 분가분리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좋은 신자처럼 보이지만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는 믿음의 향기를 발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고백을 내포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고백은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표정, 그리고 마음 씀을 통해서만 그 진실됨이 입증됩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품지 않고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진실되게 고백할 수 없습니다. 토라는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애굽 땅에서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음을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 1960년대 말에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로 파견 나갔던 분들이 생각납니다. 또 중동 붐이 일었을 때 많은 한국 남성들이 중동 여러 나라에 나가서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이기는 했지만, 참 서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기억이 있다면 지금 우리나라에 와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잘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지금 이 땅에는 110만 명이 넘는 이주민이 살고 있고, 그 가운데 이주노동자 및 미등록이주노동자(불법체류자)가 무려 7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다문화사회의 문턱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땅에 손님으로 온 그들을 잘 대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선진국의 문턱을 넘을 수 없을 것입니다. GDP가 높아질 때 선진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귀히 여기는 문화가 정착될 때 그 사회는 선진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만나는 이주민들 가운데는 결혼이나 취업을 통해 이 땅에 머무는 이들도 있고, 시리아 난민들처럼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문화는 풍부해질 것입니다.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종신교수인 현경은 이슬람권을 여행한 후에 쓴 책에서 전 세계적으로 지구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지구화는 두 가지 모형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드바드 모형과 카우보이 모형이 그것입니다.
"미국의 카우보이는 가는 곳마다 원주민과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다. 그들은 원주민을 무언가 가치 있고 배울 것이 있는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카우보이들은 원주민을 없애버리고 그 위에 자신들의 '새로운 개척지'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슬람 구전 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신드바드는 세계를 여행하며 가는 곳마다 원주민들에게서 소중한 것을 배워 고향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문화 통역자이다. 카우보이들이 총칼의 힘으로 세상과 만난다면 신드바드는 가슴과 글의 힘으로 세상과 만난다. 신드바드를 지금의 문화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글로벌 노마드 Global Nomad'이다. 그는 이웃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다름을 신기해하며 그것을 배워 체화하고 그들의 친구가 된다. 그에게 '다름'이란 혐오와 공포, 제거의 대상이 아니다. 신드바드에게 '다름'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창문이다. 그는 그 다름 속으로 깊이 들어가 다름과의 만남 속에서 더 세계적인 자신의 무슬림 정체성을 만들어낸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웅진지식하우스, 2011년 11월 25일, p.147)
'다름'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창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럽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 난민들이 유입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처리해야 할 골치아픈 문제거리로 인식하는 한 세계 평화는 요원한 꿈으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 맞아들이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마음을 열 때 우리는 한 단계 진일보한 정신의 영역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도 애굽에서 게르였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본향을 찾는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귀히 여길 때 우리는 하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 교회의 책임
지난 9월 6일에 있었던 미사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난민 수만 명이 전쟁과 기아에 의한 죽음을 피해 삶의 희망을 찾는 여정에 올라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교회는 지금 가장 연약한 자의 처지에 있는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명료하게 선언했습니다. 말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희망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럽 내에 있는 5만여 개의 모든 가톨릭 교구들에게 적어도 두 가정 이상의 난민들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했습니다. 실제로 바티칸은 난민 두 가정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공간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그들을 맞아들이기는 어렵다고 해도, 일단 난민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이들과 연대하고 그들을 후원하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것이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한결 낫습니다. 지금 이 땅에 와 있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마음의 고향 노릇을 잘 해주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의 고향이 되어 주셨습니다. 뿌리 뽑힌 이들의 '고향이 되어 주는 것',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 지금 우산조차 없이 비를 맞고 서 있는 이 곁에서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야말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가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이들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 삶 속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불편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견딜 때 우리는 더 아름다운 것이 우리 삶 속에 유입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게르'들의 고향이 되어주기 위해 갑절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지금 당장 난민들에게 마음이 열리지 않거든,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들에게라도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가장 귀한 선물을 사회적 약자들 속에 감춰두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 곁에 다가서는 순간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믿음이 날마다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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