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할 것은 많은데
마9:35-38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
• '교회'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백로에서 추분을 향해 가는 가을의 초입입니다.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밤이면 이슬이 맺혀 백곡을 영글게 하는 계절입니다. 감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은행도 노랗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덧거친 세상에서 바장이느라 팍팍해진 우리 가슴이 흰 이슬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촉촉하게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창조절 둘째 주일인 오늘은 교회연합주일이기도 합니다.
문득 '교회'라는 단어가 발설될 때 우리 속에 어떤 울림이 일어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사뭇 뭇매를 맞고 있는 형편이니 그 대답이 긍정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입니다만, 제 은사이신 변선환 목사님께서 젊은이들의 연합 모임에서 설교를 하시던 광경이 떠오릅니다. 시국이 시국인만큼 그 자리에는 사복형사들도 여러 명 들어와 있었습니다. 원고를 죽 읽어나가시던 선생님은 감정이 격앙되었던지 문득 고개를 들고는 회중들을 가만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사자후를 토해내셨습니다. "나는 한국 교회를 증오합니다." 저는 좀 당황했습니다. 신학적 논쟁의 중심에 계시던 선생님의 그 발언은 마치 자폭 테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선생님의 쓸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간결하고도 명증한 그 두 마디는 지금도 제 가슴에 큰 울림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는 교세 확장에 여념이 없는 교회, 역사를 바루는 일보다 개인의 영달과 평안에만 치중하는 교회는 선생님의 눈에 맛 잃은 소금과 같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그것은 오롯이 예수의 정신이 선포되고, 어렵더라도 그 말씀에 따라 살려는 이들이 있는 곳일 겁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교회를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 했습니다. 교회는 품지 못할 사람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예수의 손과 발이 되는 데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사역을 '경계선 가로지르기'(crossing the border), 혹은 '빗금 지우기'(erasing the oblique)라는 말로 요약하곤 합니다. 평화 없는 세상의 특색은 사정없이 가르는 데 있습니다. 나/남, 남자/여자, 흑/백, 부자/빈자, 배운 이/배우지 못한 이, 여/야, 동/서, 거룩함/속됨, 유대인/이방인…. 경계선은 대개 지킬 것이 많은 사람들이 만드는 법입니다. 그들은 경계선 저편에서 특권을 누리고 안락함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들에게 경계선 너머에 있는 이들은 불쾌하거나 위험한 이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불편한 감정을 넘어 그 경계선 너머에 있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자꾸만 다가가야 합니다.
•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예수님의 삶은 명사보다는 동사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관념보다는 실천이 주가 되는 삶이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물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듯 주님은 언제나 아픔이 있는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주님의 삶을 명토 박아 말하는 까닭은 예수에 대한 논의는 잘 하지만 예수의 삶은 철저히 따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자책하기 위함입니다. 조선 시대의 선비인 허목(許穆, 1595-1682)은 자신의 평생을 돌아보며 스스로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나는 늘 말이 행동보다 앞섰다. 자꾸 떠벌리기만 했지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경전을 손에서 놓은 적은 없지만, 그 말씀이 내 삶 속에 녹아들진 않았다. 말씀 따로 나 따로 각자 놀았다. 나는 이것이 부끄럽다. 지금에 와서 깊이 반성한다. 나 죽으면 이 글을 돌에다 새겨 내 무덤 앞에 묻으라. 뒷 사람이 이 글을 보고 자신을 비춰볼 수 있도록."(정민, <죽비소리>, 마음산책, p. 199)
참으로 엄정한 자기반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답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배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이 사람들을 부를 때 하신 말씀은 '나를 믿어라'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였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한다는 뜻일 겁니다. 35절은 예수님의 사역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35)
'가르치셨다'(teaching), '선포하셨다'(preaching), '고쳐 주셨다'(healing)라는 세 단어가 눈에 띕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일상적인 언어로 잘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좋은 이웃이 되는 것’,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선포의 언어는 우리의 일상적 의식이나 삶을 뒤흔듭니다. 예언자들의 언어를 떠올려 보십시오. 선포의 언어는 듣는 이들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 제국이 득세하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온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천당 혹은 천국으로 바꾸어서 장소적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1세기의 팔레스타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뜻하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일종의 저항 담론이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억압과 착취와 폭력을 통해 유지되는 제국이 아니라, 섬김과 나눔과 평화를 통해 열릴 새 세상의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사역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치유 사역입니다. 마태는 주님이 사람들의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고 전합니다. 질병(nosos)은 객관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병적 증상을 이르는 말일 겁니다. 질병은 우리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립니다. 질병은 삶의 활기(bios)를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애써 유지하고 있는 삶의 질서(nomos)를 깨뜨립니다. 누군가 아프면 가족들의 삶의 질 또한 떨어집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양한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인양 여기시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문제는 다음에 나오는 '아픔'(makaria)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감정적·정서적·영적으로 균형이 무너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정신의 균형이 무너지면 충동적이 되고, 화를 참지 못하고, 이웃을 너그럽게 대하지 못하고, 공감의 능력이 줄어듭니다. 그런 '아픔'은 일쑤 사람들을 비인간의 길로 인도합니다.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단식하는 이들 앞에서 자장면과 통닭을 먹는 이들을 보십시오. 병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모든 아픔을 고쳐주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고쳐주셨을까요? 가장 손쉬운 대답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능치 못할 일이 없으니까!'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우리의 무능과 무책임함을 감추기 위한 비겁한 꼼수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적극적 경청(attentive listening)의 대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온몸이 귀가 되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주님 앞에 나온 이들은 자기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을 겁니다. 그 순간 그들을 마비시키고 있던 마음이 얼음이 녹아내리는 겁니다. 거룩함 앞에 서면 사람은 다 녹습니다.
• 1세기 팔레스타인
주님이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는 이들을 고쳐주셨던 것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인간의 네 가지 본성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승자독식사회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사회 발전의 걸림돌로 취급되기 십상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잠17:5)라고 가르칩니다. 대체 왜 주님을 좇아다니던 무리들은 그렇게 기운이 빠져 있었을까요?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이라는 단어가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함락 이전이라 해서 그들의 삶이 더 나았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후 1세기의 팔레스타인은 아픔의 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조차 해결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일인당 연간 총생산은 49.6데나리온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일일 품삯임을 감안할 때 이것은 터무니없이 적은 돈입니다. 일 년 중 2달만 일하고 나머지 10달은 실업자로 보내는 셈입니다. 게다가 조세와 공납금 명목으로 최소 20% 정도를 바쳐야 했으니 이론상 한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돈은 대략 40데나리온에 불과했습니다.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액수입니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당시의 민중들은 늘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은 채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달걀 하나가 대략 1데나리온이었다니 단백질 섭취는 언감생심이었을 것입니다. 만성적인 굶주림과 영양실조에 시달렸으니 병에 대한 면역력이 있었을 리 없습니다.(에케하르트 슈테게만·볼프강 슈테게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동연, p.157ff)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는 사역은 물론이고 굶주린 무리를 먹이신 것도 이런 배경에서 보아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담보 잡힌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방편이 아니라 삶의 이유였습니다. 주님은 고생에 지쳐서 힘이 빠진 사람들, 피해 의식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을 일으켜 세워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세우려 하셨습니다. 할 일은 많은 데 그 꿈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탄식하듯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38)
• 로댕의 '대성당'
주님의 이러한 절박한 마음은 오늘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 비하면 오늘의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삽니다. 먹을 것이 지천이고, 옷장에는 옷이 넘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늘 헛헛증에 시달립니다. 조용히 삶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며 삽니다. 숨을 헐떡거립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신뢰의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신뢰는 한 사회의 토대인 데 이게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하는 정치는 오히려 끊임없이 혼돈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사람의 사람다움이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에 있는 데,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좀비들이 거리를 떠돌고 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주님의 탄식이 제 귀에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욕망의 전장을 떠도는 이들의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쳐주고, 그들에게 인간 본연의 삶을 가르치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탄식만으로 세상은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하는 주님의 물음에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사6:8) 했던 이사야가 일어나야 합니다.
파리에 있는 로댕 박물관에서 저는 '대성당'이라는 작품과 만났습니다. 만났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 작품이 교회에 대한 저의 이해를 깊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제목을 듣고 커다란 건물을 떠올리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 '대성당'은 뜻밖에도 마주 세워진, 서로를 향해 기울어진 손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 손짓은 반가움을 넘어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은 오른손과 왼손이 아니라, 두 개의 오른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로댕은 한 사람이 가지런히 모은 손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내민 손을 보여줍니다. '그리움을 담아 서로를 향해 내민 손', 그리고 그 두 손이 만들어낸 빈 공간은 참으로 평안해 보였습니다. 낯선 타자를 꺼림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여겨 다가서는 것, 그의 손을 잡는 것, 그런 관계가 빚어내는 여백에 '대성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종 프란치스코가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손을 감싸 쥐었을 때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교회가 탄생하고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의 문화는 타자를 경쟁상대로 인식하고, 내 삶의 영역에서 밀어내야 할 위험인물로 대상화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교회는 낯선 이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다가설 때 비로소 세워집니다. 크고 화려하고 안락한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너'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빚어낸 공간이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경계선 앞에서 서성이고 계십니까? 한번 용기를 내보십시오. 그 경계선 너머의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교회가 탄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소중한 것들을 소외된 이웃들 속에 숨겨두십니다. 그들에게 다가서지 않는 한 우리 삶의 비애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일터에 기꺼이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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