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천국생활 2013. 1. 30. 11:53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시편13:1-6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나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 하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여 주셔서, 내가 주님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


•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사말은 ‘나마스떼’라고 말하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정도의 인사말이지만 산스크리트어의 어원을 따져보면 ‘당신을 존중합니다’ 혹은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인사하다’로 새길 수 있다 합니다. 샬롬, 샨티 등의 인사말도 대중들에게 친숙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사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에이 숨채요.” 사할린으로, 러시아의 오지로 끌려갔던 고려인들, 까레이스키의 인사말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살아 있다는 것이 숨차도록 고맙다’는 뜻이랍니다. 생존을 위해 극한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그들이 서로를 격려했던 말인 것 같습니다. 정겹고도 처절한 인사입니다(홍순관, <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 85쪽) 눈물겹고 힘겹지만 산 자의 땅에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자는 일종의 북돋움일 겁니다.

몸을 받아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고통을 겪습니다. 가끔은 자신의 존재가 견디기 어려운 무게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잊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떤 시인은 삶이란 느낌표를 향해 가는 물음표라 했습니다. 물론 진짜 느낌표를 만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거짓 대답들에 저항해야 합니다. 오늘의 시인도 생의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그를 더욱 힘겹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조차도 그를 외면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1-2)

시인을 괴롭히는 것을 요약하면 네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잊으심, 하나님의 외면, 아픔의 지속, 의기양양한 원수들의 존재입니다. 반복되는 ‘언제까지’라는 단어는 그가 겪는 시련이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실 ‘언제까지?’라는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하소연입니다. 시인의 삶은 심각하게 뒤틀려 있습니다. 시인은 그 모든 시련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보통은 시련이 닥쳐오면 자기를 먼저 돌아보는 법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없는지, 이웃들에게 못할 짓을 한 건 아닌지, 숨겨진 죄가 없는지…. 그런데 시인은 그 책임을 하나님의 부재不在에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늘 함께 있겠다’ 하셨던 언약에 충실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은 지금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지나칠 정도로 간결한 ‘주님’(Yahweh)이라는 호칭이 시인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신의 일식을 넘어
그런데 3절에 오면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주, 나의 하나님’(Yahweh my God)으로 바뀝니다. 삶이 힘겨워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시인은 자기가 처한 곤경을 해결한 힘이 자기에게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유한함에 대한 자각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않으시면 곤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압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친근하게 부릅니다. 그는 세 가지를 구합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응답하여 주십시오’,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땅의 현실에 민감하신 분이십니다. 땅에서 들려오는 약자들의 신음 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땅에서 부르짖는 아벨의 피의 하소연을 들으시고, 소돔에서 들려오는 약자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바로의 학정에 시달리는 히브리들의 억눌린 외침을 들으시고,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라에게 쫓겨난 하갈이 자식의 죽음을 예감하며 광야 한 복판에서 처절하게 울 때, 그에게 다가오셔서 힘을 북돋우시고 희망의 약속을 해주신 분이십니다.
시인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그가 말하는 ‘죽음의 잠’은 ‘절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절망은 빛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어둠의 극한입니다. 어둠은 암담함이고, 벼랑 끝이고, 심연입니다. 극심한 가난, 고통, 실패 경험, 실망, 인간관계의 파탄 등으로 인해 벼랑 끝이나 심연 앞에 선 것 같은 사람은 어지러움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자기를 파괴하거나 남을 파괴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런 어둠 혹은 절망은 홀로 극복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만 있다면 어떤 어둠도 두렵지 않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1, 2절에서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항의하던 시인은 3절에 이르러 자기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와 너>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20세기를 일컬어 ‘신의 일식日蝕’의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일식은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자리 잡음으로써 일시적으로 태양 빛을 차단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구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태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기에 일식 현상이 나타나도 해가 사라졌다거나 해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차단하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의 창에 낀 때가 그 장애물일 것입니다. 지나친 욕심,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 미움과 시새움, 악의, 분쟁, 오만, 자랑, 무정함, 절망…. 열거하다보니 이런 것을 통칭하여 이르는 말이 떠오릅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야말로 우리 영혼의 창문을 불투명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시인은 자기 영혼을 죽음의 잠에 빠뜨리는 것들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시인의 눈은 다른 이들을 향합니다. 시인은 그를 절망케 했던 사람들, 하나님이 마치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던 사람들, 즉 악인들이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을 머리에 그려보며 소스라칩니다. 그들이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두렵고, 자기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기뻐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저는 시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악인들에게 짓눌려 절망에 빠지는 것은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패배처럼 인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 희망의 뿌리
5절에 이르러 한편으로는 투덜거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소연하던 시인의 어조가 바뀝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여기서 ‘그러나’라는 접속 부사가 참 중요합니다. 현실은 여전히 암담합니다. 상황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인은 돌연 마음의 흐름을 바꿔버립니다. 마치 안간힘을 다해 줄다리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손을 탁 놓아버릴 때 느끼는 홀가분함처럼 그는 현실을 새롭게 대면합니다. 그것은 잠시 잊고 있었지만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대한 기억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끊어졌던 회로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마음과 다시 접속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야말로 희망의 뿌리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방탕한 세월을 지내다가 생의 밑바닥에 이르렀던 탕자가 구원받은 순간은 언제입니까? 아버지 집에 대한 기억을 회복했을 때입니다. 오늘의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기억이 회복되자 그는 자기가 의지해야 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돌아가신 김흥호 목사님은 ‘믿음’을 ‘밑힘’이라고 설명합니다. 굳이 한자어로 바꾸자면 ‘저력底力’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가 절망의 탄식을 내뱉을 때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아내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더는 일어설 수 없을 거라고 말할 때, 다시 몸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회복되자 그의 마음에 새로운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5b) 시제는 미래형으로 되어 있지만 그 기쁨은 이미 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여 주셔서, 내가 주님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6) 찬송을 드리는 것은 미래에 좋은 일이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한탄하던 시인의 입술에서 찬양이 배어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접속되는 순간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못 견딜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비끌어매는 끈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 저는 진실과 사랑의 승리를 믿습니다
작년 4월에 세상을 떠나신 정호경 신부님이 이 시편을 묵상하며 바친 기도문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언제까지 저를 잊고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저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제가 밤낮 피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저를 고문하며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자들이
우쭐거리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합니까?

주님!
제발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제발 저에게 얼굴을 돌려주십시오.
제발 저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몸은 망가지고 마음마저 지쳤습니다.
병이 깊어져 눈마저 흐려지고
판단력마저 흐려졌습니다.
믿음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거립니다.

한때 저를 걱정해 주던 이웃들도
저를 잊은 지 오래되었고
이승에서는 의지할 만한 가족도 하나 없으며
가진 돈도 하나 없습니다.
이승에서는 저의 무죄를 믿어 줄 자 하나 없습니다.
저는 사막의 외로움 속에서
주님 당신만을 바라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곧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저를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자들은
한 가닥 남아 있을지도 모를
마음속 찝찝함마저 털어 버리고
좋아라 날뛰게 되겠지요!

주님!
부디 가련한 저를 살려주십시오.
시들어 가는 제 육신의 건강을 회복해 주시고,
흐려져 가는 제 영혼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주님!
불의한 자들이 날뛰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진실과 사랑의 승리를 믿습니다.
사랑이신 주님!
저는 주님 사랑만을 믿고
이 생명 건져 주실 줄 바라며 기뻐합니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결국 모든 게 당신 은총이었음을 확인하며
당신께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뼈저린 아픔과 외로움 속에서도
주님 당신께 기도할 수 있어서
기쁘고 참 고맙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정호경, <시편을 묵상하며 바치는 오늘의 기도>, 제1권 중에서)

오늘 우리의 삶이 제 아무리 힘겹다 해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시련과 고통이 있다 해도 하나님과의 접속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시30:5) 했던 히브리 시인의 기도가 현실이 되게 사십시오.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기쁨의 세상을 창조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러한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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