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드릴 예배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입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있습니까?
우리의 심장과 지정의를 그분께 봉헌하고 있습니까?
삶으로 그분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시인 최승호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예배를 '자동세탁기'에 견줬습니다. 때묻는 옷을 자동세탁기 안에 집어던지듯, 일주일 동안 살면서 지은 죄를 교회에 오는 것으로 말끔히 씻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진정한 예배를 드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12:1)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holy sacrifice)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당한 예배이고 영적인 예배입니다.
영적인 예배는 몸을 통해서만 구현됩니다.
영적인 예배를 드리려는 이들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말하는 시대, 승자 독식의 체제를 맥없이 받아들이는 시대는 악한 시대입니다.
엊그제 신문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의 72회 생일잔치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사는 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일을 누가 주관했는지, 받은 선물이 무엇이고, 하객들에게 주어진 답례품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기사를 읽다가 아차 싶었습니다.
'아니, 이게 왜 기사거리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런 기사를 썼던 것일까요?
그들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중들의 기호를 의식했던 것일까요?
돈이 말하는 시대가 분명합니다.
그런 기사를 작성하는 동안 이 땅에 살고 있는 고통 받는 이들의 사정은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절망은 그저 늘 보던
풍경인양 도외시되고 있습니다.
홀로 고독하게 죽어간 사내의 시신이 20여일 만에 발견되어도,
냉방에서 혹한과 맞서는 사람들이 있어도,
거리로 내쫓긴 이들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와도
그들의 목소리는 국민들의 귀에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남수단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시리아의 난민촌이 물에 잠겨도
그것은 우리와 무관한 현실처럼 인식됩니다.
그들의 처지를 외면하고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일 수 없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우리는 서로를 정성스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기운을
세상에 퍼뜨릴 때입니다.
올 한 해 우리 교우들의 믿음이 진정한 예배를 통해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 목사 강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