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 눈으로 보라
마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 그 얼굴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날이 맑습니다만 주중에 쏟아진 비에 피해를 입지 않으셨는지요? 인생사 참 묘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워하던 단비를 사람들은 주저 없이 궂은비라고 부릅니다. 형편에 따라 우리 마음이 오락가락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늘 위태롭고, 하늘의 마음은 미묘하니 오직 정성스럽고 한결 같아야 그 중심을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말은 참 지혜의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는 동안 한결같음을 유지한다는 것, 치우치지 않고 걷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생은 모호하기에 힘겹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습니다. 만일 모든 것이 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긴장도 활력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 해도 역시 삶은 힘겹습니다. 힘겹기에 우리는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적으로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날마다 대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때는 든든한 울타리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우리를 가두는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특히 그들이 ‘심판관’ 같은 태도로 일관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시빗거리를 찾고, 행동 하나하나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참 고단한 노릇입니다. 시편 120편의 시인이 바로 그런 상황에 빠져 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괴로움을 이렇게 말합니다.
“괴롭구나! 너희와 함께 사는 것이 메섹 사람의 손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나 다름없구나. 게달 사람의 천막에서 더부살이하는 것이나 다름없구나.”(시120:5)
급기야 그는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6)라고 탄식합니다. 공감되는 분들이 많으시지요? 함석헌 선생님의 시 <얼굴>이 떠오릅니다. 시인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하러 어디로 가는 얼굴들인가?’를 묻습니다. 그런데 어느 얼굴 하나 곱질 않습니다. 피곤과 권태와 배타성에 찌든 얼굴들뿐입니다. 시인은 ‘참 고운 얼굴’ 하나를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얼굴> 부분)
시인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은 ‘참 얼굴 하나 보고 가잠’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 얼굴과 만나셨습니까? 그 얼굴과 만났다면 우리 얼굴 또한 그를 닮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돌아보십시오. 오늘 내 얼굴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 볼 눈이 없다
오늘 본문 말씀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마음의 등불’이라면 모르겠으나 ‘몸의 등불’이라니 언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몸’은 soma라는 헬라어의 번역어입니다. 소마는 우리의 물리적인 육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삶 전체를 이르는 말입니다. 성경은 육체와 마음을 갈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둘은 옹근 전체입니다. 몸이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는 신플라톤 철학자들의 주장은 적어도 성경의 세계관에는 낯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심지어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고전6:19)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등불의 존재 이유가 어둠을 밝히는 것이니까, 이 말은 사람이 사람답게 빛을 드러내며 살기 위해서는 눈이 밝아야 한다는 말이겠습니다. 물론 눈이 밝다는 말은 시력이 좋다는 말이 아니라, 제대로 본다는 말일 겁니다. 사실 우리의 눈처럼 우리를 속이는 것도 없습니다. 오감 가운데서 정보인지능력이 가장 우수한 것이 시각이라 합니다. 외부 대상들을 아름답다 혹은 추하다 하는 판단,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의 감정을 낳는 것은 시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미인이 길을 물을 때와 그렇지 않은 사람이 길을 물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다르다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꾸미고 가꾸는 일에 열을 올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현대가 시각 중심의 문화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은 이처럼 외부로 열린 창이지만 눈처럼 우리를 속이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만나 함께 살다가 갈등상황이 벌어지면 그들은 일쑤 이렇게 말합니다. ‘아휴, 내 눈이 삐었지. 어쩌자고 저런 사람을 만나서.’ 사실 우리의 바라봄은 욕망에 의해 혹은 교만에 의해 일그러져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자기 좋을 대로 봅니다. 예수님이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요9:39)라고 말씀하시면서, 지금 본다고 말하는 이들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으셨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럼 어떤 뜻일까요? 눈이 성하다는 말은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본다는 뜻일 겁니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욕심과 교만과 인색의 비늘에 가리지 않은 눈으로 사물과 세상과 사람을 본다는 뜻이 아닐까요? 오늘의 본문을 유진 피터슨 목사의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눈은 너희 몸의 창문이다. 네가 경이와 믿음으로 눈을 크게 뜨면, 네 몸은 빛으로 가득해진다. 네가 탐욕과 불신으로 곁눈질하고 살면, 네 몸은 음습한 지하실이 된다. 네 창에 블라인드를 치면, 네 삶은 얼마나 어두어지겠느냐?”
경이와 믿음의 눈을 뜨고 사는 것과 탐욕과 불신으로 곁눈질하며 사는 삶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누구를 보든 그를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 삶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성한 눈으로 본다는 것은 결국 세상을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고 있는 자리로 보는 것이 아닐까요? 놀라고 기뻐할 줄 아는 눈만 열려도 인생이 빛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은 어떠합니까? 창에 블라인드가 쳐진 것은 아닙니까?
• 눈을 뜬다는 것
마틴 부버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를 둘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독백의 관계인데, 날마다 대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그 이용 가치로 따져보는 관계입니다. 상대방을 이용 가치로 대한다는 것은 그들을 ‘비인간’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비인간으로 대할 때 상대 또한 나를 비인간으로 대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중적 소외가 발생합니다. 사람을 이용 가치로만 평가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관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부버가 제시하는 것은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독백이 아니라 대화적 관계입니다. 이것은 아무런 전제 조건이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순수한 두 존재가 만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서로를 북돋는 관계이고, 따라서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심층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에 가장 부족한 것이 성찰하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고, 가끔 봉사활동도 하고,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올리면 사랑이 많으신 주님이 다 용서해주신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속지 마십시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내적인 변화이지 외적인 종교행위가 아닙니다.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죄성’에 대한 뼈저린 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속에 있는 어둠을 보기보다는 다른 이들 속에 있는 어둠을 보는 일에 익숙합니다. 누군가를 비난함으로써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된 줄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눈이 어두운 것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외면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비록 감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우리 속에는 그런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옛 현인들은 우리 속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험한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마음을 따라 살지 못했습니다. 타인들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 과도한 욕망의 그림자가 그것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 그림자를 떨쳐내고 싶어하지만 그럴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스기야 왕처럼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낳을 힘이 없는 산모과도 같습니다.”(사37:3c)
그렇기에 우리가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늘의 빛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속에 잠들어 있던 아름다움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마른 사람을 부르시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요7:3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우리 속에서는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입니다. 작고 사소한 변화는 우리의 의지로도 일어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주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해집니다. 주님의 빛을 받은 사람은 눈이 성한 사람, 눈이 밝은 사람이 됩니다. 그는 밭에 감춰진 보화를 보고, 겨자씨 한 알 속에 있는 천국을 봅니다. 이웃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봅니다. 눈이 있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빛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 가장 큰 이웃 사랑
예수님은 정말 성한 눈의 사람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 시몬에게서 반석 곧 베드로를 보아내셨고, 나다나엘에게서는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을 보아내셨습니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여인의 내면에 깃든 아름다움을 보아내셨습니다. 주님이 기꺼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던 것은 그들 속에 깃든 그 아름다움을 이끌어내 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속에 있는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호명하고, 또 그것이 움터 나오도록 돕는 것보다 더 큰 이웃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그런 눈으로 보고,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해 줄 때 그들 또한 우리를 그렇게 보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쁨 혹은 보람은 이런 되먹임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신뢰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삶을 축제로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믿을 때, 또 어떤 경우에도 나와 동행해 줄 이들이 있음을 알 때 우리는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 하나가 친구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로가 울타리가 되어주는 관계가 아니라, 가시울처럼 작동하는 인간관계에 지쳤던 것입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그런 자리로 몰아갑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세상에 동화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나움만을 볼 때 우리는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 속에 있는 갈망, 즉 ‘누가 나를 사랑해 주세요’ 하는 외침을 들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외침에 응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새벽에 병원 응급실에 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울부짖는 환자, 아들이 도박에 빠진 것을 비관하여 약을 먹은 아버지, 한강에 투신했다가 구조된 젊은이…그런 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인간이 가여워졌습니다.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서로 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바람이 거셀수록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는 나무처럼, 온통 사납고 추한 욕망이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기를 빕니다. 눈이 성하여 온 몸이 밝은 사람의 길을 걸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지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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