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기억과 감사의 날-------------김종필
양보할 수 없는 문제 ; 주일성수
달력에 빨간 색으로 표시된 일요일은 내겐 주일이다.
일요일은 세속인들에게 ‘노는 날’이겠지만, 신자인 내겐 ‘교회 가는 날’이다.
어려서부터 이 개념이 머릿속에 박히고 습관으로 굳어진 탓에 나는 함부로 주일을 일요일이라 부르지도 못했고,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고등학생 때는 주일을 끼고 수학여행을 간다하여
‘주일예배시간 보장!’이라는 문제로 교사들과 담판을 벌인 바 있고,
군대에서도 주일에 교회 가는 일만큼은 그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주일에 교회에 가는 것’, 즉 주일성수는 내 멘탈리티와 영성을 형성하는 핵심요체이며
크리스천됨의 표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일성수를 신앙의 핵심적 요소로 생각하는 건 비단 나만의 경우가 아니다.
한국 교회 다수의 성도들은 주일성수를 기독교인의 신성한 의무로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대략 1990년도를 즈음하여 급변하는 사회문화적 상황과 더불어
주일성수에 목숨 거는 기독교인들이 점차 줄어들게 된 것이다.
민주화로 인한 개인의 자율성 증대, 서비스와 오락문화의 발달로 인한 주말여행 증가,
경제적인 풍요로움, 그리고 주5일근무제 등등 교회 외부 환경의 변화는
엄격한 주일성수 신앙을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주말레저산업의 활성과 주일성수신앙의 약화는 표면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 관계를 단순하게 해석한 나머지 교회 밖으로 놀러 다니는 사람들을
마냥 쾌락을 좇는 불신앙의 문제로만 치부해선 곤란하다.
노동과 현대적 삶에 지친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의 참된 쉼을 얻지 못해
교회 밖으로 새어나간 것은 아닌지, 엄격한 청교도적 주일성수신앙이 오히려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 밖으로 내몬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주일에, 교회에 오든 교외가 가든, 7일에 하루씩 일을 멈추고 휴식을 취함으로써
몸과 정신을 재충전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요, 창조의 섭리임에는 분명하다.
문제는 그 7일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날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인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전통적인 주일성수 개념이 현대적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어떻게 조화시키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균형 잡힌 관점
주일이, 형식적 습관, 은혜가 빠진 건조한 예배, 과도한 봉사로 전락하지 않고,
인생의 방향과 템포를 조절할 수 있는 날로 드려진다면 그처럼 좋은 안식은 따로 없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주일성수의 형식과 습관만 남고 의미는 잃은 채, 뺀질이 신자, 설교를 비판하는 신자,
예배를 관람하는 신자로 전락하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하게 되었다.
이는 현대적 삶에 완전히 적응해버린 도시인들이 주일을 보내며 느끼는 공통점일 것이다.
양낙흥 교수의 『주일성수』는 바로 이 시점, 즉 우리가 처한 삶의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는 시점에서
‘주일성수’에 중심을 못 잡고 있는 현대 뺀질이 신자들에게 매우 적절한 지침이 된다.
저자의 논지는 다소 율법적인 주일성수를 고수하려는 자들과 다소 자유롭게 주일을 보내고 싶어 하는
개인주의자들을 모두 겨냥하고 있는데, 이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 교회 현실에
비춰 볼 때 매우 적실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균형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준다.
저자는 주일성수에 대한 역사적 고찰방법을 통해 ‘주일성수’ 문제의 본질과 쟁점을
선명하게 밝혀 주고 있고, 그 쟁점들이 시대마다 어떤 쪽으로 기울었으며
그 기울기의 빛과 그림자를 선명하게 보여 줌으로써
이 시대에서의 주일 개념을 이해하는 데 좋은 균형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역사를 통해 이 문제가 시계추처럼 다소 모순되어 보이는 두 극점을 왔다갔다 해온 것으로 본다.
주일과 안식일의 관계, 창조의 규례 및 문화적 제도, 육체적 쉼과 영적 쉼, 해방과 속박,
공동체적 예배와 개인적 묵상, 경건과 오락 등등 주일을 둘러싼 여러 쟁점들은 시대마다
조금씩 한 편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저자는 확인해 준다.
이 문제는 마치 삼위일체 논쟁과 그리스도의 양성 문제처럼 논리상으로 정확한 합치점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한 쪽으로 기울었을 때 위험하듯 주일에 대한 쟁점들도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인 양 고집스럽게 공동체에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한다.
균형 잡혔다는 것은 한편 형식논리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뜻한다.
즉, 저자가 제안하는 겸손한 관점으로써의 주일성수는 형식논리 상의 일관성에 얽매어 있지 않다.
예컨대, 7일에 한 번 쉼은 창조의 규례이지만 모든 신자에게 의무로 부과되지는 않는다,
주일은 신적 제도가 아니나 모든 신자는 신성하고 철저하게 실천함을 요구받는다,
안식은 자비로운 선행과 병행해야 한다, 등등이다.
이런 관점들을 면밀하게 확인하면서 지금 내 자신의 주일성수 태도를 돌아보니,
내 자신이 시계추처럼 양 극단을 오고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청교도적 주일성수 개념을 엄수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소 그 반대 지점으로 한참 이동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적 안식보다는 육체적 쉼으로 눈길을 돌리고, 교회 공동체보다는
가족 공동체에 치중하며, 부활의 기쁨보다는 육체의 유희에 만족하려는 등,
반대편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전인적 안식’은 아주 좋은 관점이 될 수 있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주님의 권면처럼
형식과 내용, 전통과 현대를 모두 아우르는 주일성수로의 전환이 필요하리라 본다.
기억과 감사의 날
교인들은 각각의 신앙대로 표류하며 산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 구성원들이 헛돌고 겉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신자들에게 구심점을 분명하게 세워주는 것은 바로 ‘주일성수’ 문제이다.
어쨌거나 주일에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한 예배 안에서 한 찬송을 부르며 한 말씀을 듣지 않는가!
주일은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시간 안에서 만나는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주일은 흩어져 살아가는 성도들이 공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공간 안에서
서로 만나는 문제의 연장선에 닿아 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예배가 이루어지고, 사귐이 갱신되며, 서로를 위한 헌신이 일어난다.
한 날은 다른 6일의 방향과 성격을 규명해준다.
그래서 ‘주일신학’은 성도와 공동체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며,
이 날에 관한 논의는 모든 시대 속에서 뜨겁게 논쟁되어 왔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 부활의 주님을 ‘기억’하며 찬미했듯,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과 창조주를 ‘기억’하며 그 주권 아래 들어와 묵상했듯,
오늘 우리도 주일에 함께 모여 모든 영역에서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일에 성공해야 한다.
주일은 ‘거룩한 안식’의 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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