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성수 문제

아디아포라의 영역은 없다

천국생활 2008. 7. 26. 11:39
 

아디아포라는 ‘상관없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는 의미이다.

신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 단어에 해당하는 개념만큼은 바울 서신의 몇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든 하지 않든 별 상관이 없는 일들이 있으니, 한다고 해서 굉장할 것도 없고 또 하지 않는다고 해서 별 문제될 것도 없는 그런 사항이 있다는 말이다(cf. 롬 14:17; 고전 6:12; 8:8; 갈 5:6).

교회 역사상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크게 불거진 것은 두 경우였다.

 

처음은 16세기 중반 독일 내 루터파 신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멜랑크톤과 그의 추종자들은 가톨릭의 의식(ritual)과 행습(practice), 예를 들어 성자 숭배나 견진례(confirm!ation) 등을 ‘아디아포라’의 영역으로 간주했다. 하든 말든 별 문제 될 것 없다는 입장으로 본 것

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맛디아스 플라시우스(Matthias Flacius, 1520-1575)를 필두로 한 반대파에 의해

큰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복음의 원수(곧 가톨릭교회)가 수행하는 의식과 행습 가운데 아디아포라라는

 영역은 없다고 강력히 맞섰던 것이다.


두번째 논쟁은 17세기에 있었는데 역시 루터파 내에서 발생했다.

 

이 경우의 문제는 오페라, 춤, 카드 놀이 등 세상의 여흥과 관련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한 논란

이었다. 즉 경건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러한 오락 행위를 배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파는 이 행위를 ‘아디아포라’로 간주함으로써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전자는 성경에서 명하는 바가 아닌 세상적 활동은 금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고,

후자는 성경에서 명백히 금하지 않는 바의 행위에 대해서는 ‘아디아포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니까 성경에 금하는 것이 없으니 해도좋다는 것이 루터파의 견해였고

성경에 언급한 것이 없으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칼빈파의 견해였다.

 성경은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낱낱이 제시하고 있지 않다. 비록 성경이 “교훈”, “책망”

, “바르게 함”, “의로 교육” 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든 선행을 행하도록 자격을 갖추도록(

딤후3:16-17) 돕는 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행동과 삶에 대한 시행 세칙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하나님이 명하는 바도 아니요 금하는 바도 아닌 그런 사항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실상 매우 피상적인 의견에 불과하다. 어떤 사항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어야만 그것의 도덕적

적법성 여부가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암시적인 방식이나 간접적 연관성을 통해서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항이라고 해서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별 상관이 없다고 결론을

짓는 것은 섣부르고 미성숙한 처사이다. 삶은 매우 복잡한 맥락으로 뒤얽혀 있어 어떻게 하든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경우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있을 것 같지만, 삶의 실상을 파헤치고 들어가 보면 인간의 행동과 결정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다른 맥락과 연관이 됨으로써 바람직한 것이든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든지 어느 한 쪽으로 판명이 나게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문화적 관습, 이웃 사랑이라는 맥락 즉 바울 사도는 고기를 먹는 것이 형제의 신앙에

 해를 끼칠 경우 평생 그런 행위를 금하겠다고 결의를 표한것(고전 8:13). 따라서 고기를 먹는 일이 바울

사도에게는 결코 아디아포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정서에서 지도자의 모범이라는 맥락이 있다. 지도자가 일반 그리스도인들 못잖게 이런 활동을 즐길 경우 그들은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 술과 담배의 문제에도 비슷하게 적용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들의 존재는 실상 아디아포라가 존재할 틈을 배제한다.

성경은 만물의 근본적인 가치를 선한 것이라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선하다고 했다(창1:31;딤전 4:4,롬14:14, 20). 이런 의미에서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아디아포라라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속성은 아디아포라라는 제3의 영역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은 만상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크고 작은 일-인간의 구원에서부터(엡1:5, 11) 참새 한 마리의 죽음(마10:29)에 이르기까지-을 포괄한다. 하나님은 만사를 자신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 가운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윤리적 공간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아디아포라는 존재론적인 각도에서 그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따라서 아디아포라가 인간의 일견적(prima facie) 인식에 의거해서는 혹시 가능할지 몰라도, 존재론적인 각도에서 보면 궁극적으로 그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아디아포라를 부인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필자는 자율주의(automomianism)를 배척했다. 그리스도인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법 아래 있는 것이지, 언제라도 그 법을 초월하든지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다(갈5:1). 우리는 이 자유 가운데 모든 것이 가하다(고전6:12; 10:23). 한편으로 우리는 이 자유를 이용하여 육체의 기회로도 삼을 수 있고(갈5:13),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갈5:16) 사랑의 종노릇(갈5:13; cf. 고전10:23-24)을 추구할 수도 있다.

 

비록 우리에게 아디아포라는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갈5:1, 13).............................................................

 

요지음 주일성수도 아디아포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일성수를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고...

주일을 대충지키면 된다고 ... 이는 구약에서도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언급한 것이므로 그 말씀에 준하여 지켜야 하며 아디아포라가 아닌 것이다. 모든 교리가 그러하다.

교리와 영성은 같이 가야 한다. 교리만 있고 영성이  없으면 냉냉해지기 마련이다. 영성은 있는 데 교리가 없다면 엉터리 영성이 될수밖에 없다.

아디아포라 영역은 신앙 양심의 영역이다. 양심은 항상 말씀속에서 나온 신학과 영성의 균형을 요구한다.


 

우리가 주일성수를 성숙한 지도자들의 수준에서만 생각하고 교육한다면 받아드리는 성도들의 편에서는 기대와는 아주 다른 양상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이것은 기초질서의 붕괴를 가져와 교회의 존속문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십일조 문제도 그렇다. 말라기서를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면 그 결과로 나타나는 기초질서의 문제가 후대에 교회의 존속문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송인규 박사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