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성수 문제

이단과 대조

천국생활 2008. 7. 26. 11:25

가장 효과적 이단대처는 교회 본질 회복
심창섭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신학) 특별기고  


이 논문은 총신100만기도후원회 운동본부가 올해 발행한 <총신100만연구논문집>에 심창섭 교수가 ‘이단의 정의, 판정기준, 발생원인, 특징 그리고 대책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한 글입니다. 이 글을 요약하면

1. 이단의 정의


이단은 문자 그대로 다르거나 틀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사도들이 세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거짓 교리를 주장하는 무리들이다. 이단을 지칭하는 말로는 영어에서 이단(heresy), 종파(sect), 분파(schism), 숭배자파(cult) 등이 구분없이 많이 사용된다.

서양교회사에서는 보편적으로 이단을 지칭할 때 ‘heresy'(이단)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들은 거짓 교리를 주장하고 반교회적인 행위로 인해 전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인 집단의 성격을 갖고 있는 무리들이다. 종파(sect)는 신앙적인 일부 소수집단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의미로 통용되지만 교회사적으로는 편협한 주장에 치우쳐 형성된 무리들을 말한다. 16세기 재세례파와 같은 경우를 들 수 있다. 분파(schism)는 주로 교회의 행정체제나 제도를 달리하면서 형성된 분리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무리들이다. 숭배자파(cult)는 우상숭배나 이방신과 기독교를 혼합시킨 숭배나 예배형식을 갖춘 소수집단이다. 또 정통교리(orthodox)를 왜곡하거나 부인하여 변질시키는 다색적사이비교파(hetrodoxy)도 이단으로 들 수 있다. 위에 언급한 이단들의 부류는 개괄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정의한 것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이단들은 혼합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서양교회사에서 이단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된 헤러시(heresy)라는 용어는 원래 좋고 나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중성적인 의미로 종파나 무리를 가르킬 때 성경에서 사용되었다(행 5:15, 15:5). 그러나 교회 내부의 분파(schism)나 분열(division)을 조장하는 편당을 지칭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고전 11:19). 또 부정한 죄를 범한 자들을 지적할 때(갈 5:20)와 스스로 선택하여 다양한 형태의 신앙과 생활을 추구하는 이단적인 성격의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딛 3:10). 바울은 이단이라는 이 용어를 주로 교회를 해하는 무리들을 칭할 때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 후로 초대교회의 교부시대에서도 이단을 규정할 때 이 단어(heresy)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교부들 가운데서 이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였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tyr)도 말시온이나 영지주의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eria)나 터툴리안(Tertullian)도 마찬가지였다. 이단(heresy)이라는 이 단어는 이후로 서양교회사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2. 이단 판정의 기준


기독교의 이단은 기독교의 정통적인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들을 가르치는 종파들을 일컫는다. 이단을 정의할 때는 성경의 가르침을 표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이단을 정의할 때는 공교회의 판단이 최정적인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사적으로 공교회의 판단이 잘못돼 이단으로 규정된 사례들이 있기 때문에 논자가 주장하는 것은 공교회가 최후의 판단기준이 되어야 하지만 그 판단이 바로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에 상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성경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의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3. 이단의 발생원인


한국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이었던 고 탁명환 씨는 이단 발생의 원인을 7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성경의 예언된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이단들은 일어나고 횡행한다는 것이다.
둘째, 기성교회의 제도적인 부패와 타락이 이단 종파의 발생원인이 되고 있다.
셋째,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사상으로 인한 교회와 교인들의 안일무사주의와 믿음의 표준에서 이탈하여 유리방황하는 과정에서 이단들이 발생한다.
넷째, 극단적이고 폐쇄 성향의 기성교회의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의 반작용으로 이단들이 발생한다.
다섯째, 기성교회가 교인들의 감정, 심리,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데서 이단들의 발생원인을 제공해 준다.
여섯째, 세상 징조에 나타난 위기의식의 고조를 통해 절망감을 안겨주고 자기네들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피난처에의 희망’을 안겨 줌으로써 이단들의 존립이 가능하다.
일곱째, 이단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말씀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풀게 되었다’는 등 성서해석의 오류를 통해 일어난다.”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인 혼란한 시기를 틈타서 몰몬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크리스챤사이언스와 같은 이단적인 종파들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국의 신흥종교들의 발생배경의 경우와 유사하다. 전도관, 통일교 등 무수한 유사사이비 이단 종파들이 일어난 한국교회의 상황이야말로 이단들이 발생할 수 있는 정치, 사회, 종교적인 최적의 상황이었다.

1882년 개신교가 이 땅에 복음의 씨를 심은 후에 한국은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회적인 불안정과 경제적인 고통이 지속된 역사였다. 36년간의 일제의 압제 하에서 고통당한 민족사, 해방을 맞이했으나 기쁨이 사라지기도 전에 당한 6.25 동족상잔의 비극, 남한만의 자유민주주의 회복이 이루어졌으나 부정과 부패로 일관된 사회적인 혼란의 시대, 그리고 이를 틈타 일어난 쿠데타와 군사독재 하에서의 혼란한 정세, 경제개발 제일주의의 정책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대혼란, 지속적으로 불안을 가져온 북한의 도발 위험, 대학생들의 데모와 노동자들의 시위, 경제성장주의가 가져온 사회적인 가치의 전도, 가정파괴, 도덕성의 저하 등 어느 나라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변화가 한 세기 동안에 이루어졌다.

거기다가 교회는 성장과 더불어 개신교 역사상 가장 많은 교파를 양산시킬 정도로 분파운동이 발생하였고 교회도 물량 주의에 물들었으며 교권주의와 교단정치가 판을 치는, 일반 정치 현장을 방불케하는 교단 총회들이 득실거리게 됐다. 축복신앙이 민간신앙과 접목하면서 경건하고 건실한 인격적인 성경중심의 신앙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사이비 무속신앙이 기독교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부흥신앙이 되어 유행병처럼 번져갔다.

무분별한 주관적인 성령운동이 주도하는 은사중심의 신앙이 열기를 가하면서 조용한 인격적인 신앙이 맥을 못추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휘말려 너도나도 성령체험과 열정적 신앙을 무분별하게 추구하면서 극단적인 계시론과 신비적인 체험을 기준으로 정통교회의 가르침을 이탈한 이단들이 대거 나타난 것이다. 사회적인 대혼란과 교회의 비정상적인 기능의 합작품으로 이단이라는 병리현상이 교계에 나타난 것이다.

노길명 교수는 신흥종교는 건전한 사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잘라서 말한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종교적인 결함이 또한 신흥종교의 발생원인이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회적인 병리현상은 기성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물량주의, 업적주의, 개인주의, 경쟁주의, 권위주의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교회의 극심한 분열주의는 사회적인 병리현상에서 찌든 영혼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기는커녕 실망시키는 역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성종교는 사회에서 소외된 자, 눌린 자에게 친근한 종교가 아니라 맘모스화된 중산측 중심의 종교로 변화하면서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힘없는 자들의 안식처가 되지 못한 것이 또한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자들에게 신흥 종교를 택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신흥종교의 발생에는 사회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성종교의 병리현상이 바로 이단들의 발생 근거지가 됨을 주장하며서 노 교수는 기성종교를 향한 의미있는 제언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성종교가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한다면, 민중의 고통과 한을 함께 나누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 노력한다면, 기성종교 내에서도 인간회복과 사회정의가 실현된다면, 그리고 기성종교가 병든 사회의 병든 종교로 변질되지 않는다면, 또한 기성종교 내에서도 권력이나 위세, 경제적인 부, 교육적인 지식을 갖지 못한 자들이 자리 잡을 터전이 마련되어 있다면, 고통받고 억눌린 자들이 굳이 이단, 사이비 종교 등으로 불리는 신흥종교를 찾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흥종교의 산모는 기성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신흥 종교의 발생에 대해 기성종교가 맡아야 할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성종교는 신흥종교를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냉엄하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살아 있는 종교’, ‘역동성이 있는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4. 이단의 대처방안

 

 


. 방어책의 효과적인 설명을 위해 교회지도자들의 역할과 교회(교인)의 역할로 나누어 보려 한다. 그리고 총회와 교단 차원의 대책에 대해 논하려 한다.

1)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단들은 교회 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인 목회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목회자들이 제대로 가르치고 영적인 바른 자세로 교인들을 양육할 때 이단의 발생을 막을 뿐 아니라 이단의 유혹에도 대처할 것이다. 목회자들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본다.

첫째, 목회자들은 이단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단이 나쁘며 이단들이 누군가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교회성장을 위한 많은 프로그램과 성경공부 그룹들은 활성화하지만 이단들에 대한 지식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프로그램은 등한시하고 있다.

둘째, 목회자들은 이단들에 대해 교인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 이단들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상대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단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진 인사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듣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일회용의 가르침이 아니라 평소에 목회자들이 이단들에 대해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며 이단으로부터 교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본다.

셋째, 목회자들은 이단을 대처하기 위해 자신이 건전하고 올바른 영성을 가져야 한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불건전한 영성체험에서 비롯된다. 목회자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교인들이 이러한 무분별한 체험중심의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감시하고 지도해야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목회자 자신들이 이러한 집회를 유도하면서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여 유혹하는 자의 간계에 넘어가는 경우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계시체험이나 성령체험을 경험한다는 이들의 유혹에 현혹되지 말고 말씀 중심의 인격적인 건전한 영성과 믿음에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하며 또한 교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넷째, 목회자들은 윤리적인 삶과 경건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목회자가 교회의 지도자로서 바로 서 있지 못할 때 이단들은 활기를 찾게 된다. 목회자들이 금전을 탐하고 교인들의 수준을 생각지 아니하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교권을 남용하며, 무분별한 행위를 한다면 이단들의 교주가 하는 행동과 차이점이 없을 것이다. 목회자들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진정한 목회자로 믿도록 하면 된다.

거기에는 다른 비결이 없다. “금식과 기도, 말씀, 봉사, 교제, 희생, 정결, 근검절약(단순한 삶), 찬양, 예배 등의 영성훈련 외에 주님의 형상을 닮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면 된다.

다섯째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올바른 교리교육을 시키고 성경을 분변하여 이해하는 말씀교육을 시켜야 한다.
보통 이단들의 유혹에 빠지는 자들은 초신자들이거나 자신의 진리에 확신이 없는 자들이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교인들에게 성경의 바른 진리를 확실히 가르쳐야 한다. 예를 들면 구원론과 기독론, 그리고 교회론 등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성경에서 교인들이 갖도록 해야 한다. “올바른 성경지식은 불건전하고 이단적인 성경해석을 금방 분별하도록 영분별의 은사를” 주기 때문이다.

2)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단, 사이비 분파 발생 요인들 중 대단히 중요한 것은 곧 ‘기존 기독교회들이 기독교 본연의 모습들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본연의 모습의 상실은 곧 이단들의 발흥의 시작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단들의 발생이 교회의 본질의 상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본다면 이단의 대처는 바로 교회의 본질 회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이다. 교회의 본질 회복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2~5장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삶에서 실천하는 체험”을 하는 교회였다. 교회가 생동력 넘치는 공동체로 움직임을 보여 준다. 바로 이것이 사도 시대 교회의 생명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였다. 그러면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죽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있지만 그것은 죽은 말씀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말씀따로 행동따로 믿는 풍조가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의 생리로 자리 잡혀 말씀이 선포되어도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제다. 이단들은 교주의 말을 죽으라고 맹종한다. 성경의 잘못된 해석이라도 교주가 한 해석이라면 목숨을 걸고 맹신한다.

그러나 기성교인들은 다르다. 성경말씀이 그들의 절대적인 삶의 기준이 되지 아니한다. 입으로는 고백하고 머리로는 학습되지만 가슴은 냉랭하고 손발은 꽁꽁 묶여 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은 송장들이 걸어다니는 것과도 같다. 이단들이 보면 정말로 측은히 여겨져서 영혼을 구원시키고 싶은 사람들이다. 교회는 말씀의 권능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를 말씀을 통해 경험하는 역사로 인해 생동력 있는 활기찬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언제라도 우리 가운데 이단과 같은 이리떼들이 넘나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교회의 본질회복은 성도의 교제를 통한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성 회복을 의미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의 모임이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아 나눔과 돌봄과 치유의 공동체임을 의미한다. 말씀의 능력을 삶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성경은 바로 그런 모습을 교회의 참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나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경험하고 함께 녹아지고 어울려 생명체를 이룬 성도의 교제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제도화된 교회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기계적인 교인 서로간의 관계형성으로 생명력을 상실한 현대교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함께 있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경험하지 못하고 신앙인격적인 교제가 메말라 버린 현대교회는 이단들 앞에 무능한 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교회의 본질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사랑의 실천하는 모습을 갖는 것이다.
이단들이 기존교회에 대해 실망하고 등지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교회의 정통교리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등을 돌리는 이유는 기존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실망이 크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각자의 신앙의 삶이 바로 서지 못하면 이단들은 교회내에서 언제나 생길 수가 있다. 교인들의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기는커녕 서로 간에 다투고 갈라서는 분쟁이 있는 한 이단들의 발생 가능성은 항상 잠재해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도 적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비결은 사랑의 실천밖에는 없으며 사랑의 유무가 적그리스도를 구별하는 척도라고 하였다.

넷째, 교회는 성도들이 성경적인 진리를 확실히 믿고 지키는 본연의 의무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가 비진리로 인해 상처받지 않도록 스스로 예수가 전해 준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믿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진리의 깨달음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과의 영적교제인 기도의 능력을 가져야 한다. 언제나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바울의 경고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바울은 성도의 영적 생명이 기도와 말씀에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3) 교단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


첫째, 교단 차원의 무분별한 목회자 배출을 개혁해야 한다.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것이 이단발생을 막기 위한 총회적인 차원의 일차적인 의무일 것이다.

둘째, 교단총회는 무분별하게 타교단과 교회 그리고 목사를 영입해서는 안된다.
목회자들과 교회들에 대한 아무런 검정도 없이 무분별하게 그들을 영입한다면 결국은 이단들이 발생할 수 있는 못자리를 마련해 주는 셈이 된다. 특별히 이단성의 유무에 대한 확실한 검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셋째, 교단총회는 이단 연구나 대책을 위한 상설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이단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사전에 발생을 막기 위해서는 교단차원의 이단연구를 위한 상설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교단 산하의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이단들에 대해 전문적인 연구와 대책의 강구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단들은 교묘하며 악을 행하는 데 지혜롭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교회는 경각심을 늦추지 말고 양무리들을 이리떼들로부터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도와 목회자 그리고 교단이 총체적으로 이 사역을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교회와신앙  < 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