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현 목사

갈림길

천국생활 2019. 10. 14. 12:19

갈림길
듣기

생의 갈림길
눅17:11-19
(2019/10/13, 창조절 제7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다. 그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런데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그런 다음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조각난 세상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시를 빕니다. 태풍 하기비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인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쿠루드족에게도 주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 가운데 벌어진 일을 길게 서술합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눅9:51)라는 구절로부터 시작되는 단락이 그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정 중에 주님이 하신 일은 제자들을 교육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대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붙들어야 할 삶의 원리, 이웃 사랑의 실천 등 거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사마리아 사람이 신앙의 모범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0장에는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출신의 나병환자가 그러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마리아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에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했다 하여 유대인들에게 천대받았습니다. 그들은 상종 못할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사마리아 사람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거의 모욕으로 느껴졌을 법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속에 있는 거대한 편견이 무너지지 않는 한 저 광대한 신앙의 바다에서 헤엄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사람들을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으로 가르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주님은 절감하셨던 것 같습니다. 인종, 피부색, 출신 지역, 경제력, 남녀, 성적 지향 등의 문제로 인해 세상은 조각나 있습니다. 차이를 존중하기는커녕 별것도 아닌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 일이 많습니다.

∙즉각적 응답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17:11)는 말로 시작됩니다. ‘사이’ 혹은 ‘경계’는 어떤 사건이 시작되는 장소일 때가 많습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거룩과 속됨 사이에서 새로운 역사가 빚어지는 법입니다. 접경 마을에 들어가시려던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만났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만난 게 아닙니다. 그들은 멀찍이 떨어진 채 소리를 높여 주님께 말했을 뿐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우리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질쳐서 사라졌습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런 만남이 바로 사건이 되는 만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병환자들과 예수님의 만남은 조금 애닯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들이 멀찍이 떨어진 채 주님을 불렀던 것은 사회적 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접촉하는 사람을 제의적으로 불결하게 만드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선뜻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마을 가까이 갈 때면 얼굴을 가리고 ‘불결’이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회피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비애와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예수님과 그들 사이의 거리는 곧 슬픔의 깊이였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은 세상의 지극한 아픔과 거리 두기를 하지 않으십니다. 그 고통의 원인을 신학적으로 밝히는 것은 주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의 본능적으로 고통과 소외 속에 사는 이들의 아픔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군더더기 없이 간명한 말씀입니다. 그들의 몸에 손을 댄 것도 아니고, 안수 기도를 해주신 것도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지만 나병환자들은 즉각 그 말을 이해했습니다. 율법은 나병에서 회복된 이들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완전히 나았다는 확인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일상의 자리로 복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말은 그런 절차를 밟으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즉시 돌아서서 제사장을 만나러 가다가 문득 자기들의 몸이 깨끗해 진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명령과 수행과 결과가 틈 없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즉각성을 제자됨의 모범으로 제시하려는 것일까요?

열왕기하서에 나오는 한 사건(왕하5장)이 떠오릅니다. 시리아의 대장군인 나아만도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는 히브리 출신의 여종으로부터 엘리사에게 가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의 허락을 받아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전갈을 받은 엘리사는 사환을 보내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말합니다. 나아만은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의전이 적절치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엘리사가 나와 그를 극진히 영접한 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손에 난 상처 부위에 안수하면서 정성스럽게 치유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에서 목욕을 하라는 말을 들은 그는 화가 났습니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은가‘ 하며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부하들이 그를 설득했습니다. 몸을 씻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니 한번 해보기라도 하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습니다. 설득당한 나아만이 요단 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자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깨끗해졌습니다. 경외심에 사로잡힌 그는 엘리사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했습니다. 그를 주저하게 만든 것은 자기의 지위에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 알량한 자부심이 무너져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슬픔의 지층에서 만나다
갈릴리와 사마리아 접경지대에서 만난 나병환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했고, 결국 바라던 것을 얻었습니다. 이 놀라운 치유 사건은 그대로 종결되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 이후에 벌어진 일에 주목합니다. 병이 나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누가는 지체 없이 말합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접경지대인만큼 유대인들도 섞여 있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들은 그런 차별과 적대감을 보이지 않고 함께 지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목이 감격적입니다. 우리는 아픔이 세상의 중심임을 압니다. 아픔 앞에서는 모든 사회적 차이가 무화됩니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합니다. 생의 위기 앞에서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계급적 차이란 얼마나 사소한 것입니까? 아픔과 서러움의 깊이에 다다른 이들은 그런 차이에 골몰하지 않습니다. 아픔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들은 사람을 가르는 장벽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잘 압니다. 자부심은 세상을 갈라놓지만 아픔은 세상을 일치시킵니다. 세상의 온갖 모순과 아픔이 중첩된 십자가가 구원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자기 몸이 깨끗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크게 놀라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비현실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허둥지둥 제사장을 만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가던 길을 돌이켜 주님께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온 그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앞에 엎드렸던 모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앞으로 나아감과 돌아섬이 그 부류를 갈라놓았습니다. 아홉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신 분에게 주목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선물을 받으면 기뻐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물을 준 사람을 잊곤 합니다. 문제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감사는 훈련이 필요한 삶의 습관입니다.

∙감사를 통해 열리는 세상
세상에는 지능지수(IQ) 높은 사람도 많고, 감성지수(EQ) 높은 사람도 많지만 GQ 즉 감사지수(Gratitude Quotient)가 높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감사는 관계를 이어주는 든든한 끈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이들이 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도움을 받은 이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하여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기분 나쁜 건 사실입니다. 감사의 표현은 사람들에게 선을 격려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도 반성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호의에 고마워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때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감사를 표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요즘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글을 볼 때면 개인적인 메시지를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고마움의 표현은 조각난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끈입니다. 저편 어딘가에서 내게 공감하고 호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 때 힘이 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경외하는 예언자가 자기 혼자라며 죽기를 청하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선지자 7천 명을 남겨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단 개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참 많은 빚을 지고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민주화된 세상에 살 수 있게 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억압과 싸워온 결과입니다. 역사는 세월이 간다고 저절로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역사가 조금 진보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역사의 열차에 무임승차하는 이들이 있고 대가를 치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쨌든 빚진 자들입니다.

며칠 전에 CB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을 피해 북간도 지역으로 이주해 간 이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그들은 암담한 조국의 미래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던 중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김약연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거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민족주의적인 기독교 신앙의 씨가 그렇게 뿌려졌던 것입니다. 그 시절에 벌어진 일을 증언할 수 있는 이들이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거의 마지막 증언자라고 할 수 있는 분이 문동환 목사님입니다. 올해 3월에 세상을 떠난 문동환 목사님은 작년 8월 경 제작팀을 만나 자기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끝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지하게 살면 역사와 통하게 되고 예수님하고 교류하게 되는 경험을 가질 거야.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 내가 영웅적으로 산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그렇게 끌고 갔지. 역사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민족사의 문제에 능동적으로 응답했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이 겪어야 할 아픔을 교회가 대신 짊어졌습니다. 그때 교회는 비로소 살아계신 주님의 몸이었습니다. 지금 교회가 병들었습니다. 아픔을 대신 지기보다 자기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제 육신의 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 뜻을 알고 사는 사람, 지향을 분명히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히브리 시인의 이런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시116:12). 받은 바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 삶이 건강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김현승 선생은 ‘감사란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갈림길에 섭니다. 감사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생은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이가 있는 곳에 평화와 화해와 일치가 일어납니다. 이 우울하고 어두운 세상을 견딜 힘은 인생이 고마움임을 알고 사는 이들의 연대를 통해 주어집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삶이 밝아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김기석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1226년 10월 3일, 기독교 2천 년 역사상 가장 그리스도를 많이 닮았다고 상찬받는 성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세속적인 권력까지 손에 쥔 교권주의자들이 주님의 교회를 망가뜨려 놓고 있을 때, 그는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가난의 영성’을 주창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성자 프란체스코’에서 프란체스코가 아직 세속적인 생활에 몰두하던 어느 날 꿈에 다미아노 성자를 만났던 일화를 들려준다. 



성인은 누더기를 걸친 채 맨발로 지팡이에 의지한 채 울고 있었다. 깜짝 놀란 프란체스코가 성인에게 천국에 계신 것 아니냐고, 천국에도 눈물이 있냐고 물었다. 다미아노는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면서 그 눈물은 아직도 지상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한다. 성인은 이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위험에 처했다면서 속히 잠에서 깨어나라면서 말한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여.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네. 그리스도께서 위험에 처해 있으니 어서 일어나게.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자네의 등으로 떠받치게. 온 교회가 나의 작은 예배당처럼 퇴락하고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고 있다네. 교회를 일으켜 세우게!”



프란체스코는 그것을 하늘의 부름으로 받아들였고 이후의 그의 삶은 무너진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바쳐졌다. 하나님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비웠기에 그는 자유로웠다. 앎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과 남보다 크게 보이고 싶은 허영심을 버리자 신적 사랑이 그의 속을 가득 채웠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 같은 그의 속에 숨결을 불어넣어 하늘의 소리를 발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된 채 바라본 세상은 신비 그 자체였다. 그는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부른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심지어 무정물까지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 새삼 그가 그리워지는 것은 ‘가난의 영성’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현실이 암담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교회됨은 규모에 있지 않다.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고, 사용 가능한 재정이 넉넉할 때 사람들은 자기를 과대평가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크기의 신화에 속절없이 굴복한다. 하지만 크기와 영성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가 된 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교회성장 신화에 몰두하면서부터이다. ‘성장‘이 암암리에 지상과제가 되는 순간 예수 정신은 스러지기 십상이다. 본(本)과 말(末)이 뒤집힐 때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교회 밖 사람들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각 교단의 총회가 열리는 가을이 참 괴로운 계절이 되었다. 교회는 욕망을 중심으로 맴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초월의 빛을 비추어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따라서 각 교단 최고 의결기관에서는 그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심도 있게 논의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장벽을 쌓는 일에 몰두하거나, 자신들이 제정한 헌법을 특정한 교회와 개인의 편의를 위해 왜곡한다. 토라는 재판할 때에 가난한 사람이라 하여 편을 들지도, 힘 있는 사람이라 하여 두둔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친다. 공의와 정의의 토대가 무너지는 순간 공동체 전체가 무너지기 쉽기 때문이다. 성찰적 지성보다 감정이 앞설 때 사람들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상실할 때 종교는 쇠락기에 접어든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스위스 북동부 알프스 산맥에 속한 해발 2700미터의 피졸산 정상 밑자락에 검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사라지는 빙하를 애도하는 장례 의식을 치르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기후변화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이들이라면 피조물들의 신음소리에 어떻게든 응답해야 한다. 



세상이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하고 있다. 경쟁이 심화되면서 혐오와 적대감의 언어가 늘어나고, 공감의 능력이 줄어들고 있다. 땅 끝에 서 있는 이들이 많다. 교회는 그들의 설 땅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는 신앙을 넘어서야 한다.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교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다른컬럼더보기


'이규현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아의 실패  (0) 2019.10.28
구름속의 무지개  (0) 2019.10.21
하나님의 형상  (0) 2019.10.14
예배로 시작하는 이유  (0) 2019.10.06
하나님의 기억  (0) 2019.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