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의 십일조 현황 (페이스북 펌)
*영국.......1688년 폐지.
*프랑스.....1789년 폐지. 대혁명 이후 모든 교회재산은 국가 소유이므로 교회재정 은 국가예산에서 배분
*독일.......1807년 폐지. 세금형태의 종교세1~2% 원천징수 납부 후 각 교회에 배분, 성직자는이 배분금 형태의 월급여에서 8~9%를 소득세로 원천징수 당함.
*스페인 ....1841년 폐지.
*아일랜드 ..1869년 폐지.
*스코틀랜드-2000년 폐지.
*스웨덴 ....세금형태로 종교세를 징수 하였으나, 2000년에 공식적으로 폐지.
*이탈리아 ..세금형태로 종교세0.8% 받아 그것을 교회 크기의 비율대로 나눔.
*핀란드 ....시에 따라 다르지만, 세금형태로 종교세를 1%~2.25% 납부.
*스위스 ....공식적으로 십일조 및 종교세도 없으나, 일부 주에서 2.3%까지 세금형태 로 종교세 납부.
*네덜란드 ....십일조 및 각종 헌금을 일절 철폐하고, 교인들의 생활수준에 따라 자발적 각출.
*오스트리아-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종교세)로 자기 수입의 1%만 납부.
*덴마크 ....시에 따라 차이가 조금 있지만, 국가에서 걷는 종교세 1%만 납부
*미국 ......종교와 정치의 분리원칙하에 결코 종교세와 강제적인 십일조를 걷지 않음. *北美의 연합감리교회, USA침례교, 미국장로교, 아메리카침례교 등 전 교파 모두 폐지. 다만, 남침례교회, 오순절교회(순복음교회의 뿌리) 등 극히 일부의 교단이 십일조를 하고 있다.
*멕시코 등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들.... 모두 폐지.
*그리스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영국국교회(성공회), 루터교회, 동방정교회 등 이들... 모두 폐지. (동방교회는 애초부터 십일조란 개념 자체가 없다)
*전세계의 개신교회들(아시아,중동,중미,아프리카 등의 교회들).....모두 폐지.
*전세계의 모든 가톨릭교회.... 모두 폐지.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교조차....모두 폐지.
우리나라 교회의 급성장은 십일조를 통한 부의 축적과, 정치세력과의 결탁이 가장 큰 원인이다. 바이블에 보면 십일조는 전액 불우이웃을 도우라고 되어있으나, 실제 복지에 사용되는 돈은 3~4%라고 신문에 보도
십일조, 강요해 교회 살찌우는 데 쓰는 건 죄
소외 집단 지원과 공동체적 자비가 성경 근본 정신 예수님도 웅장한 성전 보고 “다 무너지리라” 질타
‘십일조 헌금’은 누구도 범해서는 안 되는 신앙적 원칙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만 구약 시대의 관습으로 이미 시대적 적법성을 잃은 것으로 볼 것인가를 중심으로 논란이 이는 경향이 있다. 신앙적 원칙이라면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게 된다. 그렇게 될 경우,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일이 논란을 대체할 것이다. 구약 말라기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자들에 대한 규탄’이 주를 이루게 될 것이다.
반면에 십일조를 구약 시대의 독특한 종교적 관습 내지는 약속이라는, 역사적 제한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면 십일조는 이미 폐지되어도 진즉에 되었어야 한다는 논리가 선다.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이전 것은 허물어지고, 새 것이 세워진 판국에 왜 유독 구약적 관습의 잔재인 십일조는 그렇게 집착하는가 하는 비판이 여기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십일조 논쟁에 있어서 보다 더 근본적인 맥락은, 오늘날 십일조가 교회 성장에 결정적인 물적 기반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이를 축복과 저주의 조건에 결부시키는 논법에 대한 반발이 십일조 논쟁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십일조를 방어하는 측은 앞서 신앙적 원칙을 근거로 하여 십일조에 대한 비판과 폐지 주장은 성서의 정신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사고와 행위로 판단한다. 그에 반해 십일조를 비판하는 측은 이미 시효가 지난 십일조가 신앙 원칙으로 포장되어 교회를 살찌우고 교회 지도자들의 비만을 부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축복과 저주의 논법에 대한 반발이 논쟁 자극
그러면 우리는 이 양자의 논리에서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할까? 십일조는 유지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폐지되는 것이 마땅한가? 또는 중간의 길은 없는가? 등의 의문에 대하여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서가 ‘열의 하나’를 제사장에게 바치는 십일조를 최초로 언급하는 것은 창세기에서이다. 대제사장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람(그의 이름이 아브라함이 되기 전)에게 축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자, 아브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주었다’고 되어 있다. 아브람 자신이 과거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를 올리기는 했으나, 십일조를 한 것은 이 대목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십일조는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라, 아브람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 자신의 결단에 의해 정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좀더 따지고 들자면 아브람의 십일조가 그의 평생을 통한 신앙적 자세가 된 것인지 아니면, 멜기세덱에 대한 일회적 봉헌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원조(元祖)인 그의 자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원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아브람의 십일조 정신은 그의 손자 야곱에게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그는 형 에서의 추격을 피해 삼촌의 집으로 가던 중,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그 자리를 돌베개로 표시한 다음 이렇게 서원한다.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충만하게 될 것임을 믿었고, 그 충만의 기쁨을 하나님에게 표시하는 방식으로 십일조의 원칙을 세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십일조의 관계가 거듭 드러나는 것을 본다. 십일조의 정신은 자신이 거두어들인 것은 모두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을 당연히 여겼을 시대에, 실로 혁명적인 의미를 갖는 자세였다.
그런데 여기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을 때, 그 ‘드림의 절차’를 집행하는 자가 누구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십일조를 하늘에 던져 ‘하나님 받으십시오.’ 하는 것이 아닐 진데, 그것은 당연히 제사장들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열의 하나를 맡아 조직적으로 관장하는 존재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 원조들의 시대를 훨씬 지나 모세가 이끈 광야공동체에 이르러서였다.
이스라엘의 광야공동체에서 받은 십계명에는 십일조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제사적 관계를 집대성한 레위기는 십일조의 문제를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직접 명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밭에서 난 곡식이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이든지 모두 주에게 속한 것으로서,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소 떼와 양 떼에게서도, 각각 십분의 일을 나 주에게 거룩하게 바쳐야 한다.”
유산도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집단을 위해 사용되도록 못박아
레위 사람, 제사장 또한 십일조를 바쳐야 함은 물론이다. 모세의 때에 이르면, 아브람과 이삭의 시대와는 달리 십일조 문제가 개인의 헌신과 관련된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신 원칙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신명기에는 십일조와 관련해 매우 흥미롭고 의미 있는 대목이 등장한다.
“너희는 해마다 밭에서 거둔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이, 너희가 있는 곳에서 너무 멀고 가기가 어려워서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너희는 그것을 돈으로 바꿔 그 돈을 가지고 주 너희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그 돈으로 마음에 드는 것을 사거라. 어떤 것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주 너희의 하나님 앞에서 너희와 너희의 온 가족이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여라. 그러나 성안에서 너희와 함께 사는 레위 사람은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너희는 매 삼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안에 저장해 두었다고 너희가 사는 성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가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신명기에 이르면, 십일조의 기능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십일조는 유산도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공동체 내부의 레위 집단과 기타 가난한 소외 집단을 위해 사용되도록 못박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십일조가 가족들의 공동체적 축제의 자원으로 쓰일 것을 일깨우고 계신 것이다. 그러다가 이 십일조의 정신이 어느새 무너지고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것은 모두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현실이 벌어지자 이에 대하여 말라기 선지자는 질타하였다.
“사람이 하나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너희 온 백성이 나의 것을 훔치니, 너희 모두가 저주를 받는다.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십일조 정신이 파괴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제사장의 역할이 더 이상 제대로 수행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해 말라기는 비탄한 육성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십일조에 대한 옹호 논리가 가장 분명하게 성서적 근거를 갖는 대목이 말라기서의 구절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성전에 바쳐진 헌금에 대하여 예수께서 반응을 보이신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하면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일반 서민들에게 헌금의 의무를 강요하면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것을 힐책하셨다. 마가복음 12장 40절의 이 대목 이후, 헌금함 앞에서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털어 넣는 것을 보신 다음 성전을 나오자 제자들이 성전의 웅장함에 경탄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이 큰 건물을 보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과부의 생활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 가산을 성전의 웅장함을 유지하기 위해 탕진하는 당대의 예루살렘 지도자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신다. 가난한 과부로 상징되는 의탁할 곳 없는 빈곤한 사람들은 십일조를 내는 주체가 아니라, 십일조의 지원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신명기 정신’이 사라지고 이들의 가산까지 받아내 성전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질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제사보다 자비를 더욱 귀하게 여기신다고 일깨웠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배가 고파 받아야하는 양식이고 용돈일까
아브라함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십일조 헌신은 이후 이스라엘 민족공동체 전체의 종교적 율례로 정착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을 통해 확고한 성서적 지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성서의 정신과 배치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십일조는 누가 무엇을 위해 드려야 하며, 그것은 어떻게 쓰여야 하는가가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란해지면서 본래의 십일조 정신이 무너지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신앙공동체의 해체가 진행되자 말라기는 하나님의 것에 대한 절도 행위가 횡행하고 있다고 이스라엘 민족을 신랄하게 야단쳤던 것이다.
우리는 십일조가 바르게 드려지기 위해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어떤 사회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십일조를 최초로 주도했던 아브라함 이후 형성된 이스라엘 민족공동체 내부에서 토지와 재물이 매우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분배의 정의가 균형을 잃으면 ‘희년’을 통해 토지와 재물의 정의로운 재분배를 시도했던 것이다. 십일조는 이러한 구조적 조건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레위기에서 지시한 대로, ‘땅의 십분의 일’이라고 했을 때 그 땅은 누구의 개인적 소유도 아니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공적 소유였다. 이 공적 소유에서 이루어진 소출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집단적인 헌신으로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이 재물이 공동체 내부에서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십일조를 위한 사회경제적 정의라는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십일조의 전제가 이러했기 때문에 신명기의 십일조 기록이 가능했던 것이다. 십일조는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의 영적 성장을 전문적으로 감당해나가는 대신 현실의 물질적 토대가 전혀 없는 레위 집단에 대한 지원과, 의지가지 없는 고아, 과부, 나그네 등에게 베풀어지는 공동체 전체의 자비를 정신의 본질로 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 십일조 정신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후 예수께서, 세상의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신 까닭도 다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배가 고파 우리가 드리는 양식으로 배를 채우실 리 만무하며, 돈이 없어 우리가 용돈을 드려야 하는 처지가 아니실진 데,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명확한 개념이 서야 한다. 선지자 말라기가 십일조의 소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공동체의 정신적 성장에 대한 관심과 공동체 내부의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마음이 사라져 모두가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결과가 십일조에 대한 정신이 소멸된 현실로 나타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십일조는 애초에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시작되었으나, 십일조 정신의 발달 과정에서 보이듯이 그 감사가 공동체 전체의 자비에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 있게 된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그렇지 않고 성전의 치장과 성장에만 쓰이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강요한다든지 또는 아예 십일조고 뭐고 자기만 챙기는 삶이 되면 그것은 성서의 본질과 대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일조는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 신앙으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각종 공동체적 요구를 이 십일조가 감당하는 것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가 기독교 국가도 아니며, 각종 세금으로 공동체적 요구를 해결하고 있는 마당에 성서의 십일조를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다. 십일조를 존재하도록 하는 사회구조적 토대가 기본적으로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자칫, 한국 사회의 각종 공동체적 책임을 힘겹게 지고 사는 평신도들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맹렬히 거두나 본래의 성서적 근거는 은폐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까지 위협하는 십일조는 십일조가 아니다. 이미 세금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공동체적 책무를 하고 있는 상황에, 십일조까지 부과하는 것은 이중의 세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십일조의 근거가 되는 토지와 물질의 정의로운 배분이라는 사회경제적 차원의 고민이 없는 한,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맹렬히 거두어들이는 일에는 앞장서고 있으나 십일조 본래의 성서적 근거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십일조가 사회적 자비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교회의 십일조가 그렇게 쓰이고 있는가는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고, 주신 것을 그 뜻에 드린다고 할 때에 어디 십일조 정도이겠는가? 열의 열 모두를 바칠 수도 있다. 십일조는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최소의 헌신 기준을 정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의 힘겨운 현실은 십일조가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십일조는 이제 각자의 신앙에 따른 헌신의 문제로 정리해야 한다.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성서의 정신에 부합하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온전한 십일조는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순결을 뜻한다. 그러면 문제는 풀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땅과 우리의 물질의 소산에서 열의 하나를 바치기 위해 필요한 전제인 한국 사회의 사회경제적 정의에 대하여 관심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현실은 정의롭지 못한데 십일조는 계속 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십일조의 반만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 십일조를 기쁘게 낼 만큼 축복된 사회경제적 정의를 세우는 일이 중대한 과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쪼들리는 살림으로 주름살이 펴질 날이 없는 이에게조차, 하나님의 축복을 내세워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죄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진 현실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부디, 오늘날 하나님의 축복보다는 현실의 질고에서 허덕이는 이들을 압박하지 말 일이다. 힘겨운 중에도 내는 이들의 신앙적 헌신이 귀하나, 그것은 신앙의 성숙에 의한 결과로 되어야지 율법주의적 의무로 주어져서는 안 된다. 고아와 과부와 떠돌이들을 위한 십일조라면 기꺼이 내는 믿음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피곤한 십일조 논쟁은 끝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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