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주님을 찬양하여라

천국생활 2013. 11. 4. 14:48

주님을 찬양하여라
시146:1-10
(2013/11/3, 추수감사주일)

[할렐루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가 평생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너희는 힘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시온아,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나의 하나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 할렐루야.]

• 생의 다짐
좋으신 주님의 위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교회는 매년 11월 첫 주를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직접 땅에 파종을 하고, 또 추수를 한다면 오늘의 감격이 더 클 텐데, 도시에서 허겁지겁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날은 좀 생뚱같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이 계절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살아온 날을 감사함으로 돌아보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올해 우리 곁에 다가온 가을을 살갑게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가을 숲에 들어가 머물지도 못했고, 억새 바다 속을 산책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럴 마음의 여유도, 시간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일찌감치 고뿔에 시달린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아, 참 고단하다’ 하고 중얼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어딘가로 떠나 하염없이 앉아있고 싶어집니다.

그러다가도 인간의 인간됨은 누군가의 요청에 응답할 줄 아는 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정신을 차리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나의 약할 그 때가 오히려 강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문장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빚어진 문장입니다. 고통을 겪어 본 이들은 압니다. 스스로의 연약함에 놀라 낙심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직접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이웃들을 통해 전달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즐겨 은혜의 통로가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음 주 쯤에 출간될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김두식 교수의 인터뷰 모음집에 나오는 성공회대학교 김창남 교수의 사연은 참 감동적입니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노래운동을 벌이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2만 원짜리 월셋집을 구해 숨어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밥 해먹는 기색이 없자 주인아주머니는 그 고학생에게 밥을 차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월 2만 원짜리 하숙생이 된 셈이었습니다. 그냥 식구처럼 지내자는 아주머니의 호의를 그는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주머니는 호구지책으로 야구르트 배달을 하며 근근이 살던 분이었습니다. 쫓기는 신세가 된 학생을 위해 아주머니는 밥을 지어주고, 청소를 해주고, 숨겨놓은 빨랫감까지 찾아 세탁해주었습니다. 겨울에 연탄불이 꺼지면 자기들은 네 식구가 함께 지내니 괜찮지만 혼자 지내는 이가 더 어려운 법이라며 세심하게 배려해주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생이 제 아무리 가혹하다 해도 어떻게든 살아갈 용기를 잃지 않는 법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이란 고마움의 연속입니다. 은중태산恩重泰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은혜가 태산처럼 크다는 뜻입니다. 어려운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삶은 여전히 힘들어도 우리 가슴에 봄기운을 안겨주는 이들이 있고, 또 언제든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는 말입니다.

• 할렐루야
오늘의 시편은 ‘할렐루야’라는 단어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뜻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라’입니다. 가끔 이 단어가 오․남용되는 일이 있어 불편하기는 하지만 성도들의 인사말로 이처럼 좋은 말은 또 없을 겁니다. 이 단어는 늘 명령형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마땅한 의무라는 뜻일 겁니다. 이 단어가 발설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세워집니다. 이 단어는 답답한 우리 삶에 틈을 만들어 하늘의 바람이 불어오게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에 담긴 속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의 유력한 사람들을 의지합니다. 병원에 가려 해도, 법률적 도움을 얻으려 해도, 사람들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립니다. 이게 적나라한 우리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은 정말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그가 충성을 바치고 신뢰해야 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말입니다. 시인 김현승 선생님은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찬양함이 곧 감사함이고 감사함이 곧 찬양함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때 우리는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고 삽니까? ‘나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우리는 사실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세상적인 것들에 포획당한 채 버둥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이 그치지 않습니다. 벗어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야곱의 하나님,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참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야곱은 물론 이스라엘 12지파의 기력의 시작인 인물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추상적 관념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가로채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챈 후 두려워서 고향을 등졌던 사람입니다. 나중에는 외삼촌 라반과 대결하면서 애바르게 자기 재산을 증식시켰던 자기 주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할 때에 그의 곁에 다가오셨고, 머슴살이나 진배없는 세월을 보낼 때에도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얍복강에서 그의 환도뼈를 치심으로써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주셨습니다. 야곱은 그 이후 다리를 절며 느릿느릿 걷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그 덕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투성이 인물인 야곱을 다듬어 이스라엘의 밑돌로 삼으셨습니다. 가끔 우리 자신에 대해 실망할 때도 많지만, 연단하고 또 다듬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질서 있게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공평함이 없지만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 가지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세상에서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승리는 지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같은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근거 없는 낙관론이 아니라 철저한 낙관론입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잇대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결국 승리한 것입니다.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승리, 이것은 중국의 문학가 루쉰의 작중인물인 ‘아Q’ 식의 정신 승리법이 아닙니다. 아Q는 나약한 사람입니다. 아들 뻘인 동네 건달에게 매를 맞고 돌아서면서 ‘아들놈한테 맞은 셈 치지 뭐. 요즘 세상은 참 막돼먹었어'라고 혼잣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조금 슬프지요? 하지만 우리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질서를 믿기에 패배해도 패배한 게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렇기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을 자신의 일로 삼고 살아갑니다. 성서신학에서 하늘은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낮은 곳으로 향할수록 우리는 하늘에 가까워집니다.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되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이 마음 두신 곳에 우리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길이 닿는 곳에 우리도 머무는 것입니다. 그곳은 어디일까요? 시인은 그것을 명료한 언어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게 세상의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짓밟히고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살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갇힌 자를 풀어주고, 앞 못 보는 사람의 눈을 열어주시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한사코 외면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안일한 신앙생활에 빠진 우리에게 아모스의 말은 철퇴처럼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5:21-24)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순례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순례길에 나선 이들은 압니다. 아직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했다 해도 그 목적지를 향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곳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르러야 할 최종적인 목적지이지만, 지금 여기서 맛보아야 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던 시인의 노래는 "시온아,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나의 하나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 할렐루야"라는 구절로 끝이 납니다.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담담한 서술법이지만, 이 고백 속에는 천금의 무게가 걸려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유력자도 이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까닭은 모든 일이 잘 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눈 뜬 사람이 된 기쁨 때문입니다. 그분의 거룩하신 일에 초대받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잦아들면서 사람들은 육체로 변했습니다. 정신적 왜소증이 돌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가진 것 없어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 가운데도 정신적 왜소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모순과 아픔을 품으셨으면서도 스스로 비천해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의지하고 삽니까?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세상을 탓하며 살지도 않고, 뭔가에 중독된 채 살지도 않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천품을 지켜가며 세상의 유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삶의 길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자꾸만 접속할 때 우리 속에는 감사의 샘물이 솟아나오게 됩니다. 이 가을, 우리 삶이 그러한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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