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주님을 눈으로 뵙다

천국생활 2013. 5. 28. 15:22

주님을 눈으로 뵙다
욥42:1-6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 우정의 한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번 한 주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밀양 송전탑 공사 재개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고 있고,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시리아에서는 인육을 먹는 잔인한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극단주의자들의 맹목적인 증오와 폭력이 우리 삶을 위태롭게 합니다. 세상을 떠받치고 있던 기둥들이 우지끈 부러지는 것 같습니다. 굳건하다고 믿었던 터전이 흔들리는 느낌입니다. 사람들이 거칠어지고 사나워지는 것은 말세의 징조입니다.

이러한 때에 욥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사람입니다. 흠이 없이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재산도 많았고, 자식들도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삶은 하루 아침에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오클라호마를 덮쳤던 토네이도처럼, 그는 예기치 않았던 때에 큰 불행에 직면했습니다. 재산은 다 사라지고, 자식들도 다 죽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돋아났습니다. 만약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말로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요?

욥의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먼 데서 그를 찾아왔습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그들입니다.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벗이 겪고 있는 시련의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그들은 불원천리하고 달려왔습니다. 이만한 우정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잿더미에 앉아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는 사람이 바로 욥임을 알았을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습니다. 그리고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이들의 이런 모습에 놀랍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욥이 겪는 불행이 자신들에게 옮겨 붙지 않을까 싶어 얼른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않고 친구 곁을 지켰습니다.

벗들이 곁에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비로소 욥은 자기의 고통을 토로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말도 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3:20). 마치 하나님께서 사방으로 자기 길을 막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는 평화도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마저 사라지고, 두려움만 끝없이 밀려온다!"(3:26)고 말합니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의 신음소리입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떨어진 사람의 한숨소리입니다.

하지만 욥의 친구들은 당황했습니다. 욥의 말이 불경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말은 처음에는 부드러웠지만 나중에는 아주 거칠어졌습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엘리바스, 욥4:7-8)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 네 자식들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빌닷, 8:3-4)
"너는, 하나님이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소발, 11:6b)

동료 인간이 겪는 고통에 집중했을 때는 그들은 깊은 공감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고통의 원인을 둘러싸고 신학적 논쟁이 벌어지자 그들은 차갑게 변했습니다. 신학이 그들을 갈라놓았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종교 간의 갈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등장하는 젊은 엘리트 엘리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람을 징계하는 하나님은 알고 있지만, 사람 때문에 아파하시는 하나님은 알지 못합니다. 그의 신학이 동료가 겪고 있는 고통을 추상화시켜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 자기를 넘어 세상을 보다
친구들의 신학은 욥의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더 깊은 고통,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밀려났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던 그 시절(29:4)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임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선하신 분인지에 대한 확신은 무너졌습니다.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이 갑자기 낯선 존재가 된 것입니다. 아니, 그는 문득 자기 자신이 세상 사람들에게 낯선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했습니다. 친척들도 친구들도 자기 집에 머무르던 나그네와 여종들까지도 그를 낯선 사람으로 대합니다. 그는 이제 역겨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와의 대면을 꺼려 등을 돌리고, 무시하고 구박합니다.

그런데 고난의 심연에서 욥은 어떤 현실에 주목합니다. 악한 자들이 떵떵 거리고 살고, 힘없는 이들이 억압과 천대를 받는 세상 현실 말입니다. 재난이 닥쳐오기 전에도 욥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데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이들을 성심껏 도왔고,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고통 받는 자리에 서고 보니,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통에 찬 세상의 일부였습니다.

"어찌하여 전능하신 분께서는, 심판하실 때를 정하여 두지 않으셨을까? 어찌하여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판단 받을 날을 정하지 않으셨을까?"(24:1)

자기의 고난에 집중하고 있던 그가 세상에 만연한 고통의 현실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이 관계의 최고형태 입니다."

‘입장’이라는 말은 ‘처지處地’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겠습니다. 갑이 을의 처지가 되어보고, 가해자가 피해자의 처지가 되어볼 때 그들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성육신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의 처지가 되기 위해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고백입니다. 고통을 통해 욥은 이제 자기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를 품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는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를 물은 비평가가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것을 비틀어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신학이 가능한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에 있고, 하나님의 선하심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우리도 가끔 이런 질문을 제기할 때가 있습니다.


• 질문 앞에 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욥의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대장부답게 허리를 동이고 일어서서 대답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유구무언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집요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는 모든 것들, 모든 생명들에 대해 네가 아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욥은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자연 현상은 물론이고 따오기, 산에 사는 염소, 들사슴, 들나귀, 들소, 타조, 말, 매, 독수리의 생태에 대해서도 욥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의 무지함을 절감했습니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자들은 그런 질문에 생태학적인 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욥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신비, 우주의 신비 앞에서 인간은 다만 자신의 작음을 절감할 따름입니다.

옛 말에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言者不知 知者不言)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현자인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無知의 知)는 사실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라느니, 이러이러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한 일이었는지를 알았습니다.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40:4-5)

욥을 향한 하나님의 추궁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흉측하고 불길한 동물로 여기는 베헤못이나 리워야단조차 당신이 만드셨고, 당신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욥은 이제 자기 삶이 거룩한 신비임을 깨닫습니다. 여전히 자기가 겪는 고난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자기 삶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욥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쓸모로 평가합니다. 쓸모없는 것들은 폐기처분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꿀벌이 죽으면 인간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꿀벌의 수분활동受粉活動 덕분에 우리는 많은 먹을거리를 얻습니다. 꿀벌이 집단폐사하면 인간은 식량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창조세계를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 길입니다. 길고 긴 고난의 터널 끝에서 욥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합니다.


• 신앙의 성숙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42:2-3)

이런 고백 후에 욥은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귀중한 고백을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42:5)

고난을 겪기 전까지 욥은 흠잡을 데 없이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터전이 흔들리기 전까지 하나님은 그의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시련은 그의 삶 전체를 뒤바꿔놓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도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졸지에 낯선 분이 되었습니다. 욥에게 있어 하나님은 임마누엘 칸트가 말했듯이 ‘도덕적 요청’으로 존재하는 분이었습니다. 친밀하다고 여겼지만 그분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눈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일 겁니다. 볼 견見자는 ‘눈 목目’ 자와 ‘사람 人’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야말로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다는 뜻의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볼 관觀, 볼 간看, 볼 시視’ 등입니다. 모두 ‘볼 견’자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대개 자세히 본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에 핀 꽃을 보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셨을 때 사용한 단어는 ‘꿰뚫어보다’에 가까운 뜻입니다. 주님이 보라 하신 것은 새와 꽃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다는 뜻은 아니지만, 볼 견 자가 내포된 다른 한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깨달을 각覺’자입니다. ‘배울 학學’에서 ‘아들 자子’의 자리에 ‘볼 견’ 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배움을 통해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깨달음은 놀람을 동반합니다.

1738년 5월 24일, 성공회의 젊은 신부였던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소에서 그동안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뵙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의 마음에 은총의 빛이 밝아오자 그는 가슴으로 봄기운을 느꼈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엘리트 존 웨슬리, 그는 머리로만 알던 하나님이 자기 가슴에 찾아오셨음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작은 변화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넘어가자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삶의 가장자리에 내몰린 사람들을 골육지친처럼 대하게 되었습니다.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날을 계기로 그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깊은 일치를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귀로 들어 아는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은 많지만 경외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들은 많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전쟁의 위기나 경제 위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성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신뢰와 사랑과 돌봄과 나눔의 가치가 소중히 여겨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 책임입니다. 우리는 무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빌2:13)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에 무능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친절한 사람이 되십시오.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서십시오. 안일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삶으로 말씀을 구현하는 이들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서 있는 그 삶의 자리야말로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임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는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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