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미국 크리스챤 도날드 블러쉬는
“미국 기독교인들 속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 중의 하나는
교리적이며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 오고 있는 기독교의 본질적 내용들이 교회 안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내면적 영성의 개발이나 사도적 신앙에 대한 신뢰는 형편 없을 정도로 부족한 지경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이클 호튼 목사는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는 책에서 이 내용에 동의하면서 우리 시대에 있어
진리의 위기는 복음주의 교회도 세속화에 물들어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교회와 우리의 행동과 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남을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속일 수 없습니다. 다 보고 계시고 살피십니다.
오늘 우리교회의 모든 것,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당 안에 있든지 예배당 밖에 있든지, 여러 사람들 속에 있든 지 나 혼자 있든 지,
나의 모든 것, 우리의 모든 것, 교회의 모든 것을 아시고 살피시는 분이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분이 두아디라교회에게 먼저 칭찬을 하십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무엇입니까?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 5가지입니다.
두아디라교회가 이런 가치들을 처음 보다 현재 더 많이 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것
아닙니까? 두아디라교회는 에베소교회가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습니다.
믿음과 섬김의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고난을
참아내는 인내까지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을 위해서 활발한 사업까지 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사업이든 구제사업이든 두아디라교회가 주저함이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업을 확장해 가고 있었던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칭찬받을만한 장점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책망, 무서운 암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교회가 또한 두아디라교회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치명적인 문제점은 이세벨의 교훈에 빠진 것입니다.
두아디라교회는 바른 교리,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어 잘못된 교훈에 빠졌다는 점에서는
‘니골라당의 교훈’에 빠진 버가모교회(계 2:12이하)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세벨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은
둘 다 ‘우상숭배’와 ‘행음’의 죄를 짓게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탐심도 우상숭배(골 3:5)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행음, 곧 간음은 무엇입니까?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요즘 드라마들이 얼마나 이 부분이 많이 나오는 지
혼란스러울 정도입니다. 야고보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벗되는 것 역시
영적 간음(약 4:4)이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자의 본질적 특성은 그가 미래를 예언했다거나 하나님의 현재 역사를 해석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목회자나 사역자는 선지자가 아닙니다.
어떤 직통계시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선지자와 같은 수준으로 성령으로 영감된 사람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가 될 수도 없습니다. 신약의 사도는 특별한 사명을 위해 선택되어
파송자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자로 보냄받은 자입니다.
이렇게 선지자와 사도의 동등성은 양자 모두 계시의 전달자라는 점이며,
이들은 독보적인 존재이고 그들에게는 계승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세벨이 자신을 선지자라고 불렀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해석을 잘못하고,
엉터리 신학과 교리를 가르치는 차원을 넘어서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엉터리 예언을 하면서
두아디라교회를 미혹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영향으로 적지 않은 두아디라교인들이 그 교훈을 용납하고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열심히 주를 섬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죄를 섬기는 이중적인,
위선적인, 혼합적인 교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 오늘 우리교회가 회복할 모습,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순결한(거룩한) 교회, 순결한(거룩한)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1) 회개해야 합니다(21절).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잘못된 교훈을 쉽게 용납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일과 평일이 다른 우리의 모습을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에서의 태도가 다른 모습을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와 직장에서의 모습이 다른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2)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진리를 굳게 잡는 것입니다(25절).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무슨 말입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성도)의 모든 타락은 주님이 아닌 다른 무엇이 우리를 만족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할 때부터 일어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미 교회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 이미 주어진 믿음, 이미 주어진 예수님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쾌락을 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결이고 거룩입니다.
우리교회를 주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 순결한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마 10:16)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교회 외부와 내부의 거짓된 교훈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신차려야 합니다.
자꾸 새로운 것, 신비스러운 것, 비밀스러운 것을 찾으려는 욕망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우리는 만족하고 굳게 잡아야 합니다.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진리를 붙잡는 것이 바로 교회의 순결이고 거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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